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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리뷰] 소통과 단절의 중간지점은 없다, 연극 ‘바냐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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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리뷰] 소통과 단절의 중간지점은 없다, 연극 ‘바냐아저씨’
단 한 번의 외침으로 끝나버린 무능한 인간의 절규
  • 뉴스관리자 csnews@csnews.co.kr
  • 승인 2010.01.08 1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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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소통이 되지 않음에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오류를 끊임없이 반복해왔다. 이 지겨운 줄다리기에 지치는 것은 자신이다. 배려와 이해, 사랑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 환상 속에서만 온전히 이뤄질 뿐 현실에서 나를 배려하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또한 그를 이해하고 있는 것 역시 나 아닌 ‘그’뿐이다. 현실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우물처럼 깊고 어둡고 조용하기만한데 이상은 비바람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새처럼 역동적이니 이 괴리감에 인간은 지친다.

여기, 연극 ‘바냐아저씨’에는 서로가 매일 만나지만 사실은 혼자 있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독하게 무료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엘레나, 짝사랑에 상처받은 쏘냐, 일은 열심히 하지만 마음의 등불이 없어 괴로워하는 의사, 독선과 아집에 갇혀 남을 쉽게 상처 입히는 교수, 그리고 바냐아저씨. 연극 ‘바냐아저씨’는 20세기 현대연극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안톤 체호프의 작품이다. 고전의 아름다움은 한 세기가 지나도 현실을 담아내는 그 아량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속의 인물이나 갈등 관계는 2010년을 맞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시골에서 열심히 살고 있던 바냐는 우리 대신 정신없이 절망한다. 매부 쎄레브랴꼬프가 교수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어리석은 속물임에 실망하며 분노하고, 그의 후처 엘레나를 사모하며 안절부절 못한다. 사방에 총질을 해대는 지경에 이르는 바냐는 그야말로 초라하다. “내 삶은 없었다. 반평생 당신을 위한 대가가 뭐냐?”고 외치는 그의 물음은 세속과 도덕에 대해 항의하는 소시민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듯 보인다. 이 물음은 세상 어느 구석에든 닿았다가 돌아오는 유형의 질문이 아니다. 그저 하소연이다. 우리의 바냐아저씨는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가만히 생각해보자면 이 교수부부가 시골 사람들을 자극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료한 일상에 지루한 이들에게 먹잇감이 된 것 일수도. 바냐와 의사 아스뜨로프는 엘레나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떠나자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쏘냐는 이 일회성 이벤트 속에서 소통을 하려고 그나마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 착한 소녀만 유일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능동적 인간형처럼 보인다.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바냐아저씨’의 무대는 심플하다. 이들이 만나는 주 공간은 탁자 2개와 의자 몇 개뿐. 주요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8개의 독립된 공간은 8명의 자아공간이다. 스스로에겐 한없이 친절하나 외부와는 단절돼 있다. 그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그 안의 소리를 들어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에게 노출돼 마치 우리 속의 원숭이처럼 ‘구경’할 수 있다. 아무리 숨어도 인간의 삶은 낱낱이 까발려진다.

연극 ‘바냐아저씨’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사랑에서도, 절망에서도 요란하지 않다. 이 모든 상황을 누르는 힘이 있다.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비현실적이면서도 심플한 무대는 극을 어두운 하나의 색으로 이끌어간다. 그렇게 어두워지는 마지막 조명 아래 쏘냐는 바냐아저씨를 안고 말한다. “우리는 곧 편히 쉬게 될 거예요.”

[뉴스테이지=이영경 기자]
(뉴스검색제공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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