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공연 보셨어요?”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가 묻는다. 두 주 전쯤 봤다고 대답하니 “그럼 좀 좋을 때 보셨구나” 한다. 네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과 집착을 그린 연극 ‘클로져’로 처음 연극 무대에 선 뮤지컬 배우 고영빈 얘기다. ‘클로져’를 시작한지 한 달 남짓 되었다는 그의 눈에는 작품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 처음엔 그저 느끼고 생각하고 연습한 대로 연기했지만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긴단다. 늘 해왔던 뮤지컬이 아니기 때문에 객석이나 주변 반응에 예민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과연 자신이 맞게 하고 있는 것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는 고영빈. 그는 지금이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는 기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상급 뮤지컬 배우인 그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공연을 마친 고영빈과 극장의 객석에 마주 앉아 나눈 이런 저런 이야기들…….
◎ 연극 무대에 데뷔한 뮤지컬 스타
▷ ‘클로져’가 첫 연극이시죠?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나요?
▲ 지난 해 뮤지컬 ‘대장금’이 끝나고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딱 이틀 쉬니까 할 게 없더라고요. 나를 관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역시 무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작품을 안 하면 도태되고 나태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즈음 악어 컴퍼니의 조행덕 대표께서 적극적으로 ‘클로져’ 출연 제의를 해주셔서 연극에 도전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작품을 하면서 제가 부족했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느껴져서 참 기뻐요.
▷ 뮤지컬과 연극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 많이 다르죠. 화려한 무대, 감정 몰입을 도와주는 음악 등 뮤지컬은 연극에 비해 배우를 도와주는 요소들이 참 많아요. 반면 연극은 배우의 집중력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끌고 가야 해요. 힘들지만 무대에서 제 연기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어요.
▷ 고영빈씨가 연기한 부고 전문 기자 ‘대현’은 두 여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죠. 여자 입장에선 아주 짜증나는 인물인데, 지금까지 당신이 뮤지컬에서 맡아온 멋진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몰입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 저도 짜증나요. (웃음) 대현이를 고영빈과 동일시하면 어쩌나 하는 바보 같은 두려움이 생길 만큼. 뮤지컬에선 쿨하고 젠틀한 역만 주로 하다 보니 실제 고영빈이 그렇게 보여도 손해날게 없었거든요. (웃음) 역할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니까 초반엔 캐릭터에 몰입하기 힘들었죠. 어떻게 잘 포장해서 안 찌질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결국은 대현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찌질함, 무책임함으로 이 캐릭터를 설명하고 싶진 않았죠. 제가 생각하는 대현이는 순간의 감정에 솔직한 나머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소중한 감정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인물이에요. 이렇게 제 안에서 찾은 대현이의 스토리 라인으로 연기를 하곤 있는데 아직 홀가분하진 않네요. 캐릭터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제가 앞으로 연기 생활을 하면서 배워야 할 부분이에요.
▷ 프로그램 북에 ‘클로져는 나를 깨울 것이고 관객도 깨울 것이다’라고 쓰셨죠. 어떤 의미인가요?
▲ 무대 위 배우의 모습엔 그 사람의 실제 성격이나 평소 생활 모습이 반영되기 마련인데, 고지식하고 유연하지 못한 제 성격이 무대에선 좀 경직되고 무미건조해 보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를 완전히 버리고 무대에 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깨어질 것이고 나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관객들이라면 같이 깨어질 것이라는 말이에요. 좀 배우 냄새가 나는 배우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런 얘길 썼어요.

▷ 대현은 수빈과 태희 둘 중 누굴 사랑한 걸까요?
▲ 둘 다 사랑했어요. 원작자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웃음) 저는 둘 다 사랑했다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대현의 사랑은 두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받아온 이기적인 사랑이에요.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채 그저 상대방의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죠.
▷ 고영빈씨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 글쎄요.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동시에 둘을 똑같이 사랑할 순 없지만 스쳐갈 순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 다는 건 지금 하고 있는 사랑에 이미 빈틈이 생겼다는 의미 아닐까요.
▷ 대현은 극 중에서 수빈과 태희에게 첫 눈에 반하죠. 당신은 첫 눈에 반하는 걸 믿나요?
▲ 저는 안 믿어요. 저 같은 성격은 한 눈에 반해서 미칠 수가 없어요. (웃음) 한 눈에 보고 와 예쁘다 할 순 있지만 저 사람이 내 사람이야 하고 대쉬할 수 있는 용기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을 오랜 시간 지켜보고 이해해 가면서 사랑을 느끼는 스타일이에요.
▷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집착하는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사랑엔 휴일이 있지만 질투엔 휴일이 없다는 말이 생각나는데요. 고영빈씨는 별로 질투가 없어 보여요.
▲ 왜요. 저도 질투 많아요. 저 질투쟁이예요. (웃음) 사랑을 하면서 어떻게 질투를 안 해요. 나한테는 안 보였던 미소를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나……. 딱히 연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나보다 더 좋은 평을 받는 배우가 있으면 질투 나고 나보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있으면 질투 나고……. 매일 한 개 이상은 질투 하는 것 같아요. (웃음)
▷ 지금 사랑을 하고 있나요? 아니라면 지나온 사랑을 생각할 때 어떤 생각이 들죠?
▲ 안타깝게도 솔로에요. 판에 박힌 소리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일이 너무 소중해요. 저랑 대현이랑 비슷한 것이 참 이기적인 사랑을 했다는 거예요. 대현이는 다른 사랑에, 저는 일에 몰두하다가 사랑을 놓쳤죠. 이제는 책임 질 수 없는 사랑을 할 나이는 지났고……. 전 먹고 살기 위해 무대에 서고 싶진 않거든요. 저 혼자면 돈이 있든 없든 별 상관이 없어요. 나 하나만 똑바로 책임지면 되니까요. 그래서 결혼도 내가 줄 수 있을 때, 내가 웃게 해줄 수 있을 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까진 혼자도 버틸만하네요. (웃음)
▷ 그래도 배우자로 생각하는 이상형은 있겠죠?
▲ 있죠. 당연히. (웃음) 제 인터뷰를 결혼하신 분들이나 어르신들이 보시면 에이 저 놈 철 들려면 멀었다 하실 수 있지만……. 외동아들로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와서인지 몰라도 저를 잡아줄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필요해요. 저처럼 우유부단하게 시간을 끌면서 고심하지 않고 현명한 판단을 빨리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옆에서 있어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 나, 배우 고영빈
▷ 고영빈씨는 이력은 참 독특해요. 연기와는 상관없는 전기공학도에서 뮤지컬 배우가 되고,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하자 돌연 일본의 시키 극단으로 떠나고……. 국내 무대에 복귀한지 3년 정도 되셨는데 배우 경력을 돌이켜 볼 때 후회되는 선택이 있나요?
▲ 경력에 대한 후회보다는 제가 방황했던 시기에 대한 후회가 있죠. 어차피 이리 될 거 그냥 뚝심으로 밀고 나갔으면 지금보다 성숙해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고……. 쓸데없는 생각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허비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고요. 그런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최근 1년 넘게 쉬지 않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나 봐요.
▷ 그렇다면 배우로서 고영빈의 현재 위치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지?
▲ 아무것도 없죠. 제 위치가 어디에 있겠어요. 어느 순간 고영빈이라는 배우가 사라져도 대한민국 공연계에는 아무 영향도 없는데요. 제 위치라는 건 없구요. 그냥 저를 봐주시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지금부터 흔들리지 않고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단단한 뿌리를 만들어 나가야죠.
▷ 언젠가 인터뷰에서 특별히 하고 싶은 작품이나 역할이 없다고 하셨죠. 그 생각엔 변함이 없나요?
▲ 그거 사실 참 창피한 일이에요. 그만큼 제가 무지하다는 뜻이거든요. 많이 보지 못했고 많이 공부를 안했다는 얘기고……. 다들 저 작품이 좋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왜 좋은지 모르겠어서 하고 싶은 욕구가 안 생기는 거예요. 이제부터 그걸 공부하려고요. 그래서 나중에 나이 먹고 백발이 됐을 때, 이건 하고 죽어야지 하는 작품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런데 유전적으로 백발이 금방 될 것 같긴 하네요. (웃음)
▷ 배우 고영빈을 지탱하는 힘은 뭘까요?
▲ 어머니요. 어머니께선 절 참 힘들게 키우셨어요. 어머니께서 일하시느라 저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랑 함께 산 기간이 다 해봐야 10년이 채 안돼요. 저는 절대 어머니를 욕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 자존심으로 지금까지 버텨왔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3년 정도 됐는데요. 만약 언제든 제가 흔들리고 바르게 서지 못한다면 어머니가 하늘에서 속상해 하실 거예요.
▷ 73년생 소띠시니까 2009년은 고영빈씨의 해가 되겠네요. 새해 소망을 말씀해 주세요.
▲ 한 살 더 먹었으니까 어른답게 초조해 하지 말고 여유롭게, 비는 시간이 있으면 그걸 좀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저에게 주어진 무대는 항상 최선을 다해 서 있을 거고요. 영어 공부도 좀 하고……. 미국이나 영국 쪽에 연수나 아님 여행이라도 가서 안목을 넓히고 저를 깨울 수 있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배우로서 자신의 위치는 아직 없다고 말하는 고영빈. 이미 배우이면서 배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단단한 사람이었다. 우직한 황소처럼 목표를 향해 한발 두발 묵묵히 걸어가는 그에게 소의 해인 2009년이 결실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뉴스테이지= 조수현](뉴스검색제공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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