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하기 
기획 & 캠페인
카사노바 나의 편력
상태바
카사노바 나의 편력
  • 고은비 소비자 csnews@csnews.co.kr
  • 승인 2007.04.23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카사노바''라는 단어는 바람둥이, 호색가의 대명사 처럼 사용된다.

하지만 카사노바가 자신의 이름이 이런 식의 대명사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면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카사노바라는 인물은 단순한 바람둥이라기에는 꽤나 복잡한 이력을 가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동안 유럽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던 모험가이자, 10대에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면서 4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화학, 철학, 문학에 박식했으며 펜싱과 도박, 춤을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호색가이기도 했다. 평생동안 수십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고, 자신의 자식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걸 알고 속으로 웃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속에서 카사노바 만한 바람둥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 카사노바만 유독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취급받는 걸까?

그 이유는 아마도 카사노바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만년에 카사노바는 둑스 성의 사서로 일하면서 수십권의 저서를 썼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내 삶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자서전이다.

카사노바는 17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6남매의 맏으로 태어났다. 10대 시절에 파도바의 대학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으로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타고난 방랑벽으로 인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은 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카사노바는 젊은 시절에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않았고 고정적인 수입도 없었다.

그런데도 화려한 생활을 할수있었던 이유는 카사노바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고, 적당한 때에 대담하게 벌인 사업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업들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카사노바는 사업을 접고 돈이 궁해질때면 사람들에게서 감언이설로 돈을 얻어내거나, 도박판을 휩쓸고 다니면서 돈을 긁어 모으기도 했다.

카사노바는 또한 여행가이자 모험가이기도 했다. 그는 1755년에 베네치아의 피옴비 감옥에 투옥된다.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지만, 18개월후에 탈옥에 성공한다. 그는 탈옥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감옥소장에게 남긴다.

"사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죄수를 강력한 권력으로 감옥에 가두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석방될 수 없는 죄수가 자유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재판관의 권리는 정의에 입각해야 하고, 죄수의 권리는 자연의 본성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재판관이 죄수를 감옥에 처넣을 때 동의를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수도 탈옥하기 위해 재판관의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방랑이 시작된다. 졸지에 탈옥수의 신분이 된 카사노바는 이후에 오랫동안 베네치아에 돌아가지 못하고 뮌헨과 스트라스부르, 파리, 런던, 페테르부르크를 떠도는 방랑생활을 한다. 물론 가는 도시마다 많은 여자들을 만나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나고 러시아에서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대화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각 나라에서 받은 인상을 꼼꼼히 회고록에 남긴다.

카사노바는 파리를 가리켜서 ''결함이 많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 도시''라고 표현하고, 영국인에 대해서는 ''법을 엄격히 준수하는걸 자랑으로 여기고 무례하고 무뚝뚝하다''라고 평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술주정은 러시아 전체에 만연되어 있는 악습이다'' ''진정한 독재가 어떤 것인지 보고 싶거든 러시아로 가보라''고 말한다.

카사노바의 거침없는 모험도 1766년을 기점으로 내리막으로 들어선다. 남자의 액년은 마흔 두 살이라고 한다. 카사노바도 이 나이로 들어설 즈음부터는 더 이상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1766년에 바르샤바에서 쫓겨나다시피한 카사노바는 이후에 가는 도시마다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추방당한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파리에서도 추방당한 카사노바는 탈옥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방랑을 계속한다.

카사노바의 말년은 우울한 나날이었다. 이후에 사면되어서 베네치아로 돌아가지만, 다시 그 곳에서도 추방당한다. 이미 ''정치적 망명자이자 사기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카사노바를 반겨줄 도시는 유럽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카사노바는 1785년에 둑스 성의 사서로 자리 잡고 1798년에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많은 저서를 남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카사노바는 성의 하인들에게 경멸당하고 비웃음 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카사노바가 회고록을 쓰기로 작정한 것도 이런 배경이었을 것이다. 화려했던 젊은 시절은 가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것은 경멸과 모욕뿐. 카사노바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하루에 13시간씩 회고록을 저술했다고 한다. 당시의 편지에서 카사노바는 이렇게 말한다.

"일을 하면 할수록 온몸에 열기가 느껴집니다. 이 일이 내 앞에 있는 한, 나의 삶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즐거운 일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어떻게 해서 나한테 즐거움을 주는지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카사노바의 흥미진진한 일대기이자 프랑스 혁명을 앞둔 유럽사회의 자유로운 풍경을 알려주는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베네치아의 운하를 달리는 곤돌라와 파리의 오페라 극장, 런던의 어두운 골목이 눈앞에 나타난다. 무엇보다 사기꾼과 호색한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카사노바, 그러면서도 삶과 자유를 사랑했던 카사노바의 인생과 내면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

< 출처 : 인터넷서점 yes24의 김준희님 >


주요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