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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간의 역사는 블랙코미디, 연극 ‘다윈의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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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간의 역사는 블랙코미디, 연극 ‘다윈의 거북이’
인간에 대한 지적 유희
  • 뉴스관리자 csnews@csnews.co.kr
  • 승인 2009.10.20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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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어린 드류 베리모어는 E.T를 만났다. 머리가 유난히 큰 E.T는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인간들과의 교감을 이룬다. 2007년 트랜스포머가 지구에 왔다. 인류보다 뛰어난 지능과 힘을 지닌 트랜스포머는 제멋대로 변신도 가능하다. 영화나 책 등에서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외계생물체들은 인간보다 월등하다. 우리가 그들을 알아보기 전에 지구를 찾아냈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술로는 제조 불가능한 무기와 비행도구를 타고 온다. 살고 죽는 생명체가 그렇다면 신은 말할 것도 없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 지혜와 능력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착한 외계생물체들은 다행이도 인간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려 했으나 그들과 신이 인간을 조롱한들, 딱히 할 말도 없다. 인간도 인간을 조롱하니까. 늘 조롱하고 늘 조롱받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거북이라면, 인간을 조롱하는 게 거북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받지 못한 다윈의 거북이 헤리엇이 인간을 조롱할 때 당황하게 된다.

하찮고 하찮은 인간의 역사
곱사등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는 헤리엇은 진화된 거북이다. 찰스 다윈은 실제로 섬에서 거북이를 데려왔으며 그의 거북이는 170년 이상을 살다가 죽었다. 그 거북이가, 죽은 줄 알았던 다윈의 거북이가 아무도 모르는 새 진화돼 인간을 모습을 하고 저명한 역사학 교수를 찾아간다. 그런데 이 진화의 과정이 기이하다. 작은 거북이는 전쟁의 가스와 연기를 마시며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다.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느림을 저주하는 과정에서 두 발로 서게 됐으며, 유태인 아이를 구하려는 그 순간 그동안 목격했던 탄식할만한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며 NO!를 외치게 됐다. 이렇듯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에 의해 진화된 헤리엇은 이제 자신의 고향 갈라파고스 섬으로 돌아가려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의 역사에 대해 헤리엇은 알지 못한다. 인류가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헤리엇은 쳇바퀴 도는 인간의 악순환 고리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인류를 향해 외칠 말은 오직 NO!뿐. 그래서 자신의 섬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그런데, 거북이다. E.T, 트랜스포머와는 다르다. 무언가를 타고 날아가도 힘든 판에 도와주는 사람은 없으며 스스로 걸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헤리엇은 교수에게 직접 보고 겪은 역사의 현장들을 이야기해줄 테니 자신을 갈라파고스 섬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이제 비루하고 참혹하고 찌질한 인간들의 역사가 펼쳐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거북이일까.

거북이는 진화한다, 인간은? 퇴보한다
인간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기록한 역사는 축약돼 있다.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삶 같지 않은 인생은 몇 줄의 요약이면 충분하다. 거북이는 그 모든 것을 바닥에서 올려다봤다. 인간들처럼, 인간들보다 느린 걸음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인간들처럼, 인간들보다 낮은 곳에서 바라본 헤리엇의 기억들은 기록보다 참혹했다. “그 모든 재앙들, 죽어간 사람들을 난 내 속에 넣고 다녀요. 살기 위해서는 잊어야 해요. 많이 살아다는 건 잊어야 할 것도 많다는 거죠. 내 기억은 내 등껍질처럼 너무 딱딱해요. 그리고 너무 무거워요. 과거의 무게가 내 곱사등처럼 날 짓누르네요.” 오랜 시간 책을 들고 연구해온 교수는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 따위는 모른다. 진화된 거북이 헤리엇에 대한 진심도 없다. 오직 역사적 자료로만 이용할 뿐이다. 헤리엇을 관찰하는 의사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헤리엇이 그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발휘한다. 거북이는 진화했다. 그러나 인간은 진화화지 못했다. 인간의 변화는 진화가 아닌 퇴보다.

헤리엇을 통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성과를 이루려는 교수, 교수의 아내 그리고 의사. 이들의 삶과 언행은 유머로 가득하다. 물론 그들은 진지하다. 그러나 관객은 웃는다. 병원 원장인 아버지와 학장인 어머니, 이 가족들의 단결로 인해 겨우 의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헤리엇의 담당의사는 관객들을 웃게 만든다. 그 어이없음과 허무함, 하찮음에 관객은 즐거워한다. 다시 말해 관객은 객관적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비웃는 것이다. 인간이 풍자하는 대상은 언제나 인간이다. 불신·절망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삶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이 우울한 유머여, 인류가 계속되는 한 영원토록 찬란하게 빛날지니!

[뉴스테이지=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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