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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슬로베니아 국립 마리보르발레단 ‘라디오와 줄리엣’ 흑백영화 속을 걸어 나온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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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슬로베니아 국립 마리보르발레단 ‘라디오와 줄리엣’ 흑백영화 속을 걸어 나온 줄리엣
  • 뉴스관리자 csnews@csnews.co.kr
  • 승인 2009.10.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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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케묵은 고전은 식상하다. 그러나 모두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여 색다르게 표현하는 작품도 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리플리’로, ‘오픈 유어 아이즈’는 ‘바닐라 스카이’로 리메이크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들이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고전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색다른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이는 공연이 있었다. 제12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2009)에 초청된 슬로베니아 국립 마리보르발레단의 ‘라디오와 줄리엣’이다. 한국 관객에게 다소 생소한 이 발레단의 작품은 그 제목과 포스터에서부터 기존의 클래식 발레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 남다른 감수성과 해석력을 지닌 안무가 에드워드 클루그

슬로베니아 국립 마리보르 발레단의 단장이자 안무가 겸 무용수인 에드워드 클루그는 최근 무서운 기세로 주목받고 있는 안무가이다. 바르나 국제발레콩쿨, 나고야 국제무용콩쿨, 모스크바 볼쇼이 국제발레콩쿨 등에 대거 수상하였으며 2005년에는 슬로베니아 최고의 영예인 프레세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 독일에서 열린 탄츠메세(Tanzmesse)에서 “선배 안무가들을 단숨에 제쳐버릴 신예 안무가”라는 호평을 받았다. 평단은 그가 동유럽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미니멀리즘과 세련된 동작, 뛰어난 음악 해석력으로 개성적인 안무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SIDance 이종호 예술감독은 그의 혁신성과 창조성에 주목하여 향후 3년간 서울세계무용축제에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공연 전 인터뷰를 통해 그는 자신을 라디오 헤드의 열성팬이라고 소개하며, 그들의 음악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전했다. 또한 관객들에게 익숙한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소재로 하면서도 자신만의 해석적 자유로움이 깃든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본 작품은 고독하고 차가운 현대에도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는 메시지를 현대적 감각으로 보여준다.

- 문화예술계가 사랑한 라디오 헤드

그동안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극, 영화, 뮤지컬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프로코피예프, 구노, 벨리니, 딜리어스, 차이코프스키, 레너드 번스타인, 베를리오즈, 바즈 루어만, 프란코 제피렐리와 같은 각계의 거장들이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에드워드 클루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바즈 루어만의 영화<로미오와 줄리엣>과 상당히 많이 닮아있다.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화면 전환을 통해 현대적 시각에서 고전을 해석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러나 극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상당히 닮아 있는 것은 이들 모두에 라디오 헤드의 음악이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광고계를 풍미했던 ‘Creep’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몽환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선율을 떠올릴 것이다. 1992년 데뷔 앨범 ‘Pablo Honey’에 수록된 ‘Creep’을 통해 영국 팝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라디오 헤드는 영화계가 사랑하는 뮤지션으로도 유명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Exit Music’, ‘바닐라 스카이’의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트와일라잇’의 ‘15 step’ 등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다. 무용분야에서는 지난 ‘2004 머스 커닝햄 in Seoul’의 작품 ‘Split Sides’에서 시규어 로스(Sigur Ros)와 함께 특유의 몽환적이고 실험적인 창작곡을 연주한 바 있다.

‘라디오와 줄리엣’에서는 상실과 고독을 노래하며 줄리엣의 절망과 소외, 외로움의 감정을 한층 북돋우는 역할을 했다. 각 장면에는 기존에 알려진 곡들 외에 연극적인 분위기를 지닌 최신곡들이 사용되었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는 장면의 ‘How to Disappear Completely’는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고, 머큐쇼가 죽음을 앞두고 고독한 춤을 추는 장면의 ‘Bulletproof...I Wish I Was’는 서정적인 선율과 감수성이 묻어나는 보컬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 현란한 기교로 점철된 줄리엣 이야기

공연이 시작되면 오래된 영화관에 와있는 착각이 든다. 적막 속에서 영상이 나타나고 이국적인 교회풍의 건물을 따라 올라간다. 어느 방 앞에 도착하면 관객들은 숨죽여 방문을 연다. 새하얀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는 인물의 형상이 보이고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이 세세한 신체 곳곳을 따라간다. 문득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이 없다. 차갑게 식어있을 뿐이다. 줄리엣이 로미오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줄거리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영상이 끝나면 바로 무대 위에 남성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검은 색 정장의 남성 무용수들은 강한 비트에 맞추어 점프와 턴을 선보였다. 캐논 형식(두 사람이상의 무용수가 주제를 순차적으로 반복하는 형태)이 지나치게 사용되었지만 무용수들의 기량이 워낙 뛰어난 탓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직접 머큐쇼로 분한 에드워드 클루그는 놀라울만한 기량과 감정표현을 선보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코르셋 의상의 줄리엣은 각 신체의 분절을 유연하게 활용하면서도 발레의 정확한 포지션을 유지했다. 5명의 남성 무용수들 속에서도 테크닉과 에너지가 부족하지 않았다. 줄리엣의 상실감과 고통이 작품의 핵심인 만큼 로미오, 머큐쇼, 티볼트 역할을 번갈아 추는 5명의 남성 무용수들과 함께 난도 높은 동작을 선보였다.

작품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운명적 만남, 두 가문간의 다툼, 가면무도회, 결혼식 등의 장면은 추상적이지만 개연성 있게 그려진다. 상징적인 의미의 소품들을 활용하여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도회에 사용하는 가면은 마스크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반추하며 마시는 독약은 레몬으로 함축되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으로 압도된 무대에서 오로지 6명 무용수들의 움직임, 영상, 음악, 조명만으로도 훌륭한 연출이 가능함을 보여준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매력적이었던 공연으로 기억될 것이다.

[뉴스테이지=홍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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