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는 청춘을 위한, 청춘에 의한, 청춘이 부르는 노래다. 이 작품은 영화 ‘마법사들’을 원작으로 한다. 이른바 대세라 할 만한 ‘무비컬’에 속한다. 그러나 뮤지컬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는 화려한 판타지 대신 리얼함을 택했다. 이는 영화에서 보여줬던 청춘의 후회와 고독, 사랑에서 비롯된다. 관객들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지상에 발 딛고 서 있는 뮤지컬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 아래는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를 ‘Up↑ & Down↓’이란 코너로 집중 분석해본 것이다. ‘Up↑ & Down↓’은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의 장ㆍ단점을 스스럼없이 토해냄으로써 작품의 발전을 도모하고 한국 뮤지컬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 스크린에서 무대로 옮겨지다
Up↑ 밴드의 음악에 현장감이 덧입혀지다
장르의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뮤지컬의 양식으로 표현됨으로써 관객에게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게 됐다. 기존 스크린에서 영상은 녹음된 음원을 통해서 전달했다. 그러나 뮤지컬로 표현되었을 때 관객은 라이브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제재가 ‘밴드’인 만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등장인물인 마법사 밴드들은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한다. 극의 후반부에는 관객과 함께 작은 공연을 갖기도 한다. 이들이 아파하고 사랑하는 무대는 산장을 개조한 카페다. 영화 ‘마법사들’은 어두운 숲 속 산장을 배경으로 한다. 때는 겨울이다. 밖은 춥고 눈이 쌓여있으며 산장을 개조한 카페는 어둡고 차갑다. 뮤지컬은 영화의 배경을 놓치지 않았다. 주 공간은 카페나 겨울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자작나무 숲 또한 압축돼 보여진다. 영화 속 카페와 비슷한 뮤지컬 속 무대는 조금 더 아기자기하다.
Down↓ 영화의 연극적 요소가 희석되다
영화 ‘마법사들’은 ‘원 테이크 원 컷’으로 제작됐다. 96분이란 영화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커트만 존재한다. 영화의 입체적 시ㆍ공간을 한 커트에 담기 위해, 영화세트는 연극의 무대처럼 꾸며 졌다. 그리고 음악은 시ㆍ공간을 넘나드는 매개체로 작용했다. 영화라는 양식에서 이 방법의 시도는 국내에서 신선한 반응을 일으켰다.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한편의 연극을 보는 착각을 받는다. 그러나 무대로 옮겨졌을 땐 너무도 당연한 방법이 된다.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음향적 효과가 다른 시ㆍ공간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건 이미 활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시간과 공간을 조각하는 마법 같은 음악’이란 표현은 ‘원 테이크 원 컷’의 영화를 벗어나서는 큰 상징적인 의미를 잃는다.
◎ 관객과 공감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 살아있는 캐릭터
Up↑ [자은] 이유 없이 불안한 현대인의 모습을 담다
관객은 ‘자은’의 불안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예술가적 기질이라고 여기거나, ‘새엄마’라는 말을 통해 그녀가 자라온 환경을 유추해볼 따름이다. ‘자은’의 뚜렷한 이유 없는 불안은 현시대인의 내면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항상 불안한 그녀는 세상과 다투고 연인 재성과 다툰다. 완벽하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의 외로움과 고독함이 ‘자은’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 ‘시티라이트’를 함께 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수 쓸쓸히 낙하하는, 슬픈 기타리스트 자은. 관객은 남은 마법사밴드의 멤버들과 함께 그녀를 추모한다. 세상과의 불화와 외로움을 안타까워하며 극과 함께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
Down↓ [자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신경질적인 인물이다
‘천개의 불한, 하나의 희망’을 읊조리는 ‘자은’이 안타까우면서도 관객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자은’의 불안은 ‘넌 날 몰라’라고 소리치고, 술을 마시고, 환각제를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관객은 영문도 모른 채 ‘자은’으로부터 과도한 감정을 강요받는다. 당연히 관객은 ‘자은’이 가진 심리상태의 배경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극은 그 배경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있어 ‘자은’은 ‘깨지기 쉬운 유리알처럼 예민한’ 아티스트가 아니라, 신경질적이고 멀리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된다.
Up↑ [하영] 우리는 모두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죽은 자 보다 남은 자가 더 힘들기 마련이다. ‘하영’은 ‘자은’의 자살 이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일종의 죄책감이다. 죽도록 누군가가 필요했던 그날 ‘자은’은 ‘하영’에게 영화 볼 것을 요청하고 지친 ‘하영’은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 날 ‘자은’은 자살하고 만다. 그때부터 ‘하영’을 감싸고 있는 죄책감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하영’을 보며 관객들은 지난 후회로 괴로워하며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고독한 인물 ‘자은’과 후회로 범벅된 인생을 살아가는 ‘하영’은 현대인들을 상징한다.
Down↓ [하영] ‘마법사’ 밴드, 관객 추억의 공유가 필요하다
‘자은’은 뚜렷한 이유 없이 불안해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유 없는 불안을 경험하는 현대인의 내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극의 개연성 부족으로 볼 수 있다. ‘하영’의 경우 ‘자은’의 죽음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할 만큼 엄청난 충격과 자책감을 갖는다. 그러나 극에서 보여준 ‘하영’의 과오는 ‘자은’의 영화관람 요청의 거부와 같은 응성받기 거절이다. 죄책감으로 물든 삶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관객이 이런 것을 느끼는 이유는 ‘추억의 공유’가 부족하다는 데 기인한다. 이 아쉬움은 극의 개연성 부족을 도출해 아쉬움을 더한다. ‘마법사’ 멤버들이 ‘자은’과 유대를 좀 더 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극의 시선을 따라가는 관객 또한 ‘자은’이란 인물을 포한 마법사 멤버들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추억의 공유는 관객이 ‘자은’의 죽음을 보다 더 애도하고, ‘하영’의 가슴앓이를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뉴스테이지=이영경 기자, 정은승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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