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기만 한 술잔이 타구(唾具)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그는 취기가 자신의 몸에서 이미 확 달아나고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몸을 갈갈이 부숴놓을 것 같은 욕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문호는 건너 편의 성진을 바라봤다. 지루제를 바르지 않았을 터인데도 계속 두 여자와 뜨거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타이완 대학의 외국인 유학생 중에서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가슴 저 밑에서 성진의 얼굴을 한번 후려갈기고 싶은 욕망이 계속 치솟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친구라고 오랜만에 짜릿한 즐거움을 맛보도록 배려해준 데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하고 한잔 하지? 이제는 선배나 성진이같은 친구들은 거의 다 돌아가 버리고 새로 유학 온 새파란 젊은 후배들이 대부분인데. 빌어먹을……너무 여유를 부린 것이 죄구나, 죄야! 성진이가 부럽네"
한참이나 한달여전 맛본 짜릿한 열락의 순간과 환희의 뒤에 찾아오기 마련인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회상하던 문호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투덜거렸다. 성진이 돌아간 상황에서 그에게는 이제 마땅한 술 친구를 구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려 8년 동안이나 공부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하루에 한번이나 올까 말까한 전화인 터라 분명 반가운 사람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문호, 논문 준비는 잘 돼 가나. 괜찮다면 만나세. 오랜만에 한 잔 하는 게 어때?"
전화를 건 사람은 문호의 중국인 친구 송광평(宋匡平)이었다. 문호와 중문학과 박사 과정에 같이 재학중인 말 그대로 백면 서생으로 전공은 그 어렵다는 원(元)나라 때의 곡(曲), 즉 희곡이었다.
물론 그 역시 문호처럼 빨리 졸업하려는 생각은 아예 않고 있었다. 문호와는 수년전부터 마음이 통해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니 시쳇말로 동병상련이 따로 없는 절친한 친구라 할 수 있었다.
"아, 자네는 정말 내 둘도 없는 친구 중의 친구야. 내 마음을 이렇게 꿰뚫어보고 있으니.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기 위해 생겼겠지, 아마. 그래 그럼 어디에서 만나지?"
"시먼딩이 어떨까? 오랜만에 시내 구경도 좀 하자고. 내가 살테니 둥야호텔 로비에서 다섯시에 만나지"
"이야, 그 비싸 데에서 술을 사겠다는 거야? 자네 어디에서 눈먼 돈이 좀 생긴 모양이군. 군자는 진실로 가난하다는 자네의 좌우명을 오늘 깨는 것은 아니겠지"
문호는 광평이 시먼딩의 고급 호텔 둥야(東亞)에서 만나자는 제의를 하자 짐짓 놀라는 척 하면서 되물었다. 어려운 사정으로 말하면 광평은 자신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이 사람아! 딱히 만날 만한 곳이 없으니까 둥야호텔에서 만나자고 하는 거야. 그 뒤로 돌아가면 시먼(西門)시장이 있잖아. 그곳 어디 적당한 집에서 소박하게 한잔 마시자는 거야, 내 얘기는. 우리같은 처지에 그런 호텔에서 술을 마시면 술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술이 체할 걸. 이를테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가난은 어쩌면 운명적인 것인지도 몰라"
광평이 재미 있다는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목소리가 그답게 무척이나 시니컬했다.
"좋아, 좋아! 아무려면 어때. 우리같은 백수 건달에게는 차라리 그런 곳이 속 편하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내 마음은 그런 기분이야. 그럼 나중에 보자고"
문호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외출을 서둘렀다. 귓전에서는 현실과는 엄청나게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광평의 파안대소하는 웃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기숙사 밖의 태양은 아직도 저 멀리로 넘어갈 생각을 하지조차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