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톤 체홉 그물질을 하다
희곡 작가 꼬스챠는 자괴감과 애인의 변심에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2년 후 유명 작가가 된 그와 3류 배우로 전락한 옛 연인 니나가 재회한다. 그러나 니나는 다시 한 번 그의 곁을 떠나고 꼬스챠는 결국 자살을 한다. 극은 낚싯대에 걸려 미친 듯이 파닥거리는 한 마리 고기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물로 넓게 그러모은 고기떼에 가깝다. 전자에는 비교적 익숙한 셰익스피어를 들 수 있고 후자는 체홉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 어린 연인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갈매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고리로 넓게 얽혀 있다. 같은 사랑이라고 해도 온도 역시 크게 다르다. 생각만 해도 뭉클한 설레임과 가슴을 옥죄어 오는 절망대신, 관객들이 가져가는 것은 감정에 대한 두어 걸음의 거리와 체온만큼의 사랑이다. 그물질은 일상의 노동이며 삶의 단면이다. 그만큼의 진정성을 가진 파장은 뿌연 포말처럼 오랜 여운을 남긴다.
- 박근형식 연출법, 관객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힘이 들어가지 않은 연기가 극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간다. 아르까지나 역의 배우 서이숙과 니나 역 장영남은 다른 배우들의 탄탄한 받침 위에 올라 빛이 난다. 중반부에서 아르까지나는 여배우와 어머니, 한 남자의 애인을 모두 넘나든다. 연민과 분노, 애정을 고루 달리는 감정의 높낮이는 마치 한 곡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다. 박근형 연출의 시선 처리법은 극에 차분히 배어있다. 인상적이지만 유난스럽거나 모나지 않다. 유난히 배우들이 앞을 보고 있는 장면이 많다. 객석 방향으로 설정된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다. 극의 주요 소재인 갈매기나 호수를 바라 볼 때 고조되는 인물들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묘미다. 니나 역 장영남의 호소하는 눈빛은 이런 연출법에 탁월하게 어울린다. 극 중 극을 보고 있을 때도 무대 위 객석은 관객과 마주 놓여 있다. 때로는 호수를 향해 객석으로 배우들이 파고들기도 한다. 박근형 연출의 ‘갈매기’는 이렇게 기존 연극에서 한 발짝 빠져 나간 대신 관객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와 있다.
- 가장 밝은 고통에서 신음하다
극의 클라이맥스를 비추는 것은 그 날 중 가장 밝은 조명이다. 3류 배우로 정신이 피폐해진 니나가 옛 애인 코스챠 앞에서 격정적으로 대사를 토해내는 장면에서, 연출은 무대 왼편에 거칠게 모아놓은 십여 개의 조명을 최대로 밝힌다. 역설적인 시각 효과를 사용한 이 장면은 공연 장면 중 백미이다. 이런 밝은 빛은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최대로 짙게 하여 비극을 부각시킨다. 동시에 괴로움 뒤에서 빛을 밝혀 지쳐있는 삶을 위로하기도 한다. 꼬스챠의 자살에서 순간적으로 히스테릭한 웃음을 흘리는 아르까지나의 모습 역시 같은 이유로 매우 인상적인 결말을 만들어낸다.
연극 ‘갈매기’는 러시아의 빨간 벽돌집에서 균열로 어긋난 벽돌 한 장을 떠올리게 한다. 금이 가거나하면 무너질 진흙 담벼락이 아닌 견고한 벽돌담. 결코 쓰러지지는 않을 삶의 한 단면과 같다. 다른 비극과는 다르게 그다지 울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 균열에서 나오는 파편과 부스러기는 끊임없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뉴스테이지=백수향 기자]
저작권자 ©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