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K5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을 함박웃음 짓게 만들고 있다.
기아차는 지난달 말 출고가 시작된 K5가 1주일 만에 3천552대나 팔리며 기염을 토하더니 이달 들어서는 형님 현대차를 앞질러 버렸다.
업계에 따르면 기아차는 이달 1일부터 20일까지 2만7천909대의 차량을 판매해 2만3천419대를 판매한 현대차를 4천490대 앞섰다.
이에 따라 20일 기준 국내시장 점유율은 기아차가 42.3%로 35.3%에 그친 현대차를 크게 따돌렸다. 기아차 역사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IMF 외환위기로 부도난 뒤 1998년 현대차그룹에 인수된 후 작년 3분기까지 만성적자에 시달렸던 기아차의 비상은 경영진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다.
외형상 기아차가 현대차의 점유율을 깎아먹은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그룹 전체로 봐서 상황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저가 정책을 내세운 수입자동차의 공세와 르노삼성의 추격으로 정체양상을 보이고 있던 현대기아차 그룹의 매출은 K5 출시 이후 다시 반전하고 있다.
작년 현대차와 기아차는 국내 시장의 50%와 30% 등 총 80% 안팎의 점유율을 자랑했다. 하지만 올 들어 현대기아차는 국내시장서 침체를 보였다. 3월 78.8%, 4월 76.2% 5월 76.9%로 시장 점유율이 계속 하락한 것. 그 빈자리는 SM3, 뉴 SM5를 출시한 르노삼성차가 차지했다. 르노삼성이그 여세를 몰아 쌍용차 인수전까지 뛰어들었으니 현대기아차로서는 위기감을 느낄만 했다.
그러나 K5의 출시로 기아차의 판매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데 힘입어 이달 현대기아차의 국내 점유율은 77.5%로 회복됐다. 수입차들이 국산차와 비슷한 가격에 신차를 쏟아내고 있는 상황에서 거둔 것이기에 더욱 값진 성과다.
그 뿐이 아니다. 기아차의 도약은 만년 1위의 타성에 젖어 있던 현대차가 비상을 걸게 만들었다.
기아차 '비상(飛上)'에 현대차는 '비상(非常)'
최근 현대차 영업사원들은 길거리 판촉으로 내몰리고 있다. 현대차의 전 직원 대상 차량 판매 독려는 2000년대 들어 처음있는 일이다. 동생에 의해 자존심이 잔뜩 구겨졌음을 반증한다.
공격적인 마케팅도 시작했다. 현대차는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이 8강에 진출하면 출고 고객 총 888명에게 차 값의 전부 또는 일부를 돌려주는 '8강 기원 캐시백 행사'를 진행 중이다.
이어 8월을 대반격의 디데이로 잡고 있다.
현대차는 8월 신형 아반떼의 출고를 시작한다. 준중형차 수요를 감안할 때 아반떼의 인기가 K5를 넘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신형 아반떼는 연비가 ℓ당 2~4㎞가량 뛰어나고 최고출력도 20~30마력가량 높다.
지난 21일부터 전국 현대차 대리점에서 사전계약에 들어간 신형 아반떼는 사전계약 닷새 만에 1만대 계약을 넘어선 것으로 전해졌다.
8월 출시만 정해졌을 뿐 아직 구체적인 판매시기와 가격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같은 열기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다.
더구나 신형 아반떼는 준중형 모델로 각종 편의사양 장치가 강력해 벌써부터 판매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아반떼가 '대박'을 터뜨리고 11월 그랜저 신모델까지 가세하면 현대차가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정몽구 회장 품 벗어난 기아차 승승장구?
2009년 3월6일 기아차는 정몽구 대표이사 체제에서 탈피 10년 만에 홀로서기에 나섰다. 이후 오너인 정의선 사장이 기아차 사장을 맡았으나 현대차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기아차는 서영종 사장의 전문경영인 체제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그룹 내 두 형제의 무한 경쟁 체제를 선언한 것이다.
평소 정몽구 회장은 "무한 경쟁의 시장에서 살아남는 단 하나의 방법은 최고 품질의 차를 생산하는 것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일례로 지난 3월 현대차가 국산 중형차 최초로 YF쏘나타 전 모델에 사이드&커튼 에어백을 장착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이를 먼저 계획한 곳은 기아차였다. 동생 기아차가 준비한 차별화 마케팅을 형이 가로챈 셈이다.
정 회장이 대표에서 물러난 지 1년이 갓 지난 현재, 이 같은 물밑 경쟁을 시너지로 승화시킨 기아차는 가파른 성장을 이어가며 만성 적자에서 탈피했다.
작년 18조4천157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70% 성장한 1조1천445억원. 그간 최대치였던 2003년 8천124억원의 두 배에 육박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아차의 약진이 그간 꾸준히 내수 1위를 차지했던 자만심으로 가격을 올리고 소비자를 기망하는 등의 비판을 받아왔던 현대차가 다시 한 번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좋고 나쁨이 뚜렷한 YF쏘나타와 유럽형 디자인의 K5가 서로 경쟁을 하며 현대기아차의 중형차 시장을 늘리는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지난 달 12일 자동차의 날 행사장에서 서영종 기아차 사장은 "K시리즈의 상승 무드에 도취돼서는 안 된다"고 경각심을 놓치지 않았다.
서 사장은 "기아차가 최근 K5, K7의 K시리즈와 스포티지R, 쏘렌트R 등 SUV로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기는 하나 아직은 잘 나간다고 확정짓기 어렵다"면서 "해야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아차는 내부에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노조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법안 백지화를 내걸고 이달 초부터 특근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 특근 거부에서 나아가 파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수요가 아무리 많다 한들 생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소비자는 떠날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