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무모하게 꿈을 좆기도 현실에 안주해버리기도 어정쩡한 나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징적인 나이, 서른. 시간은 공평하기에 그 누구라도 서른은 피해갈 수 없고, 각자의 상황에서 저마다의 성장통을 앓는다. 그렇기에 예나지금이나 무수히 많은 책과 노래, 영화, 공연에서 서른의 고뇌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2001년 초연 이후 국내에서 5번째로 공연 중인 ‘틱틱붐(Tick, Tick... Boom!)’은 서른을 노래한 대표적인 록뮤지컬인 동시에 작품의 작곡가인 조나단 라슨(Jonathan Larson)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라슨의 대표작인 ‘렌트(Rent)’와 음악과 설정 면에서 유사점이 많은 형제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1960년생인 라슨이 1991년 완성한 ‘틱틱붐’은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채 서른을 맞게 되는 무명 뮤지컬 작곡가 존의 막막함과 부담감, 고뇌,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그려낸 작품. 주인공 존은 조나단 라슨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실제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장차 스티븐 손드하임과 같은 위대한 뮤지컬 작곡가가 되는 것이 꿈인 존은 천장에서 물이 샐 정도로 허름한 뉴욕의 아파트에 살면서 식당 웨이터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꿈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 존에게도 서른은 두려운 나이다.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인 양 틱톡거리며 서른을 향해가는 시계 초침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 부모님과 애인 수잔, 배우의 꿈을 접고 안정된 직장인의 삶을 택한 배꼽친구 마이클의 존재는 그에게 끊임없이 현실을 인식시키며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던 중 서른 번째 생일을 앞두고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뮤지컬 ‘수퍼비아’의 워크숍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존은 좌절하는데...
이처럼 단순한 스토리가 시공을 초월해 관객의 공감을 얻는 이유는 바로 그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1990년에 서른을 맞은 미국 청년 조나단 라슨의 고민은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2010년 한국 젊은이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꿈와 현실의 기로에 선 존, 현실과 타협해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으론 꿈을 포기하지 않는 친구가 부러운 마이클, 무능력한 애인이 답답하면서도 안쓰러운 수잔은 극 중 인물인 동시에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관객은 존, 마이클, 수잔의 모습에서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라슨은 그의 분신 존을 절망 속에 방치하지 않는다. "당신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이라는 손드하임의 전화 한 통으로 존의 미래에 한 줄기 빛이 비추며 극이 마무리되는 것. 갑작스러운 해피엔딩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미가 다시 살아나는 '렌트'의 엔딩과 닮아 있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는 라슨식 해피엔딩은 그러나, 실소(失笑)보다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아마도 라슨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나 보다. 당신의 감각을 믿고 원하는 대로 나아가라는 극중 ‘수퍼비아’의 넘버 ‘Come to your senses’는 ‘틱틱붐’의 정서다.
2010년 한국의 ‘틱틱붐’은 이전의 버전들과는 사뭇 다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예전의 음울한 정서를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아쉬울 수도 있는 부분이나 이번 무대는 또 그만의 미덕이 있다.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는 밴드의 강렬한 라이브 연주 속에서 배우들은 반원형의 무대와 객석을 수시로 오가며 관객과 교감을 시도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듯이... 맨 주먹 뿐인 청춘을 상징하듯 최대한 소품을 자제한 세트, 단벌의 의상으로 무대에 선 배우들은 오로지 연기와 노래로 캐릭터를 표현해 낸다.
서른 즈음에 걸쳐 있는 신성록(존 역), 윤공주(수잔 역), 이주광(마이클 역)은 모두 제 역할을 만났다. 몸만 자란 어린아이 같은 신성록의 존은 대책 없어 보일 정도로 낙천적이었다는 라슨의 실제 모습을 보는 듯하고, 일인 다역을 연기하는 윤공주와 이주광의 재치 넘치는 연기는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의 흐름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조나단 라슨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패러다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렌트’의 역사적인 브로드웨이 첫 공연을 앞두고 대동맥류 파열로 급사했다. 때는 1996년,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렌트'와 '틱틱붐' 두 편 뿐. 만약 라슨이 살아 있다면 우리 나이로 쉰이 넘었을 터. 그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손드하임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을지, 반짝하고 사라진 수많은 작곡가 중의 하나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남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겼느냐가 아닐까. 2030년, 2050년...그 이후의 젊은이들도 조나단 라슨의 작품을 보며 꿈을 꿀 것이고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뮤지컬 ‘틱틱붐’: 11월 7일까지.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 이항나 연출. 박칼린 음악수퍼바이저. 강필석, 신성록, 윤공주, 이주광 출연)
조수현(공연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