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출장의 경우도 국내 지방출장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김봉투 기자 일행이 비행기를 탄다는 소문이 퍼지자, '출입처와 출입처 주변'에서 연락들이 왔다. '출입처'의 연락이란 당연히 출입처의 장(長)과 임원들이다. '출입처 주변'의 연락은 출입처 산하 기업이나 유관 기업으로부터의 연락이다. 이들은 여비에 보태라며 봉투들을 내놨다. 그러니까, 기자들은 출입처 '안팎'에서 '낑'을 챙겼다.
출입처 홍보실장의 역할 또한 빠질 수 없었다. 국내 출장 때와 똑같았다. 이러저러해서 기자들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으니 알고 있으라고 슬그머니 귀띔을 해주는 것이다. '상급기관'의 홍보실장이 하는 귀띔은 단순한 귀띔이 아니다. 흘려들으면 안 된다. '하급기관'인 산하 기업과 유관 기업이 '상급기관'의 홍보실장을 감히 무시할 재간은 없다. 알아서 '봉투'들을 들고 와야 한다.
작은 돈이 모이면 큰돈이 된다. 푼돈인 동전만으로도 커다란 벙어리저금통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돈이라고 할 수 없는 10만 원짜리 봉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봉투 10개가 모이면 순식간에 100만 원이 될 수 있다.
어떤 곳에서는 아예 '100달러 짜리' 미국 돈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어차피 해외에서 쓸 돈이라면서 '달러'를 '낑'으로 보태준 것이다. 그것도 '빳빳한 달러'였다. 환전할 필요마저 덜어주는, 가장 '만족스러운 낑'이 아닐 수 없었다.
김봉투 기자는 이렇게 챙긴 '낑'으로 1,500달러를 환전해서 출국했다. 신문사의 '출장 명령'을 받고 출국했으니 마닐라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부터 취재해야 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곳은 홍콩이었다. 먹을 것 많고, 놀기 좋다는 홍콩부터 찾은 것이다. 취재는 나중의 일이었다. 즐기는 것이 급했다.
홍콩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김봉투 기자는 함께 출국한 동료 기자 2명과 함께 카메라부터 한 대씩 사서 어깨에 걸었다. '증명사진'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 같았으면 '디카'를 구입했겠지만, 당시에는 자동 카메라였다.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사진 찍기 쉽고, 선명하게 잘 나온다며 추천한 제품이었다.
김봉투 기자가 카메라를 구입하자 동료 기자들도 똑같은 카메라를 덩달아 구입했다. 이른바 '뇌동매매'였다. 덕분에 3명이 똑같은 카메라를 나란히 메고 다니게 되었다. 어쨌거나, 김봉투 기자는 카메라값으로 150달러를 지출했다. 1,500달러를 가지고 출국했으니 남은 돈은 1,350달러로 줄었다.
'밤에 피는 향기'를 '야래향(夜來香)'이라고 했다. 중국말로는 '예·라이·썅'이라고 발음한다. 우리말로 하면 마치 상소리처럼 들린다. 김봉투 기자 일행이 밤에 한 일은 '향기'를 맡는 일이었다.
그럴 듯한 술집을 두 군데나 찾았다. 중국 술과 양주를 번갈아 퍼마셨다. '대륙'에서 건너왔다는 '파트너'도 만났다. 중국본토 출신이라는 '파트너'였다. '향기'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파트너에게 제법 많은 '달러'가 지출되었다. '달러'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중국본토로 송금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중국 파트너는 '중공' 파트너였다. 공산 오랑캐였다. 김봉투 기자는 '적국' 파트너와 만났던 것이다. 그것도 베개를 같이 베기도 했으니 김봉투 기자가 만약에 거물이었다면 주시를 받을 뻔했던 일이었다.
김봉투 기자 일행이 홍콩에 도착하자 현지에 있던 '출입처' 산하 기업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군데나 찾았던 술집의 계산과, 숙박비는 이들이 처리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용하려고 구입한 카메라값과 파트너에게 지출한 '달러'만큼은 김봉투 기자 일행이 내야 했다. '무관의 제왕'에게도 염치라는 것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김봉투 기자는 수백 달러의 돈을 홍콩에서 지출했다. 본래의 출장목적지인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800 달러 정도만 남고 말았다.
해외 출장은 사실상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앞으로도 갈 나라가 많았다. 그런데도 주머니는 얄팍해진 것이다. 김봉투 기자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출입처에서 경비를 댄다고 해도 돈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까짓 돈 떨어지면 중간에 귀국하면 된다며 배짱을 편하게 먹었다. 그래도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낑'이라는 것은 해외에서도 생겼다. 국제회의에 참석한 '출입처와 출입처 주변' 사람들이 김봉투 기자 일행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함께 하자고 해서 식당에 가면 '낑' 봉투를 내놨다. 저녁식사를 하자고 연락이 오면 '낑' 봉투도 함께 왔다. 봉투 속에는 모두 '달러'가 들어 있었다. 역시 '빳빳한 달러'였다. '만족스러운 낑'이 아닐 수 없었다.
김봉투 기자 일행은 '출입처 안팎'에서 '낑'을 챙기더니, '나라 안팎'에서 '낑'을 또 챙기게 되었다. 얄팍해졌던 주머니가 어느새 다시 두툼해졌다. 그것도 '달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