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는 계속 심하게 흔들렸다. 김봉투 기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적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캄캄한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반짝이며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별이 될 것이라는 요망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정신을 가다듬어보려고 좌석 수를 세어봤다. 모두 24개뿐이었다. 작은 비행기였다. 바람만 조금 거세지면 어디로 쓸려갈지 모를 정도로 빈약한 경비행기였다. 이 경비행기가 국경을 넘으며 헐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맨 앞좌석에 앉아 있는 흑인 청년이 뒤척거렸다. 책을 들고 있는 것이 학생으로 보였다. 흑인 학생은 비행기가 덜컹거릴 때마다 책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두리번거렸다. 표정에는 김봉투 기자처럼 겁이 잔뜩 묻어 있었다.
김봉투 기자는 건너편 좌석으로 눈을 돌렸다. 어떤 백인 할머니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를 하다가 손으로 십자가를 그리다가 했다. 만약에 불행한 사고가 나더라도 천국에 갈 할머니가 틀림없었다.
김봉투 기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출국하기 전에 가입했던 1억 원 짜리 보험도 떠올려보았다. 아내가 보험료로 아이들을 키우며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잡생각을 했다.
이 불안한 비행기가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한국 기자단 집단 추락사'라는 제목으로 미국이나 캐나다 신문에 기사가 먼저 실리고, 곧 이어 한국에서도 보도될 것이다.
그렇지만 기사의 내용은 뻔했다. 한국의 '기자단'이 여행경비를 '슈킹'해서 놀러 다니다가 캐나다 국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빈정거리는 기사다. 열심히 '취재'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만났다는 동정적인 기사는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불명예'가 아닐 수 없었다. 가급적이면 '순직'이 되어야 바람직했다. 그래야 '기사'를 위해 일하다가 '기사' 때문에 죽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기자다운 일생'이었다고 해줄 것이다. 하지만 순직은커녕 '꼴 좋다'는 손가락질이나 면하면 다행일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들었다.
애당초 캐나다를 일정에 포함시킨 것이 잘못이었다. 미국 구경이나 제대로 하고 귀국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일행 중 한 기자가 악착같이 우겼다. 모처럼 미국 구경을 하는 김에 나이애가라 폭포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이애가라 폭포는 미국 쪽에서 보면 보잘것없다고 하더라. 캐나다 쪽에서 봐야 제격이라고 그러더라.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캐나다까지 가자. 나이애가라 폭포를 구경하자. 기회를 놓치면 제법 후회들 될 거다. '증명사진' 찍을 기회가 또 생기겠는가."
이렇게 우겼다. 그래서 김봉투 기자 일행은 캐나다 방문을 일정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정에 없던 일정을 추가하려면 '대책'이 필요했다. 공항에서 기다려줄 사람, 호텔비 내줄 사람, 나이애가라 폭포까지 안내해줄 사람, 술 살 사람, 밥 먹여줄 사람 등등 여럿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민폐를 끼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사람을 두루 '엮어야' 했다.
하지만 김봉투 기자 일행은 그런 일에는 능숙했다. 이미 도통했다. 한두 번 끼쳐본 민폐가 아니었다. '벼락치기'로 '콜'을 했다. 어지간한 '슈킹' 솜씨가 아니면 어려울 일을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비행기를 탔더니 웬걸. 목숨이 오락가락하게 된 것이다.
괘씸한 것은 미국 항공회사였다. 미국 항공회사는 감히 한국에서 온 '무관의 제왕'들을 무시했다. 승객이 적다며 출발을 자기들 멋대로 2시간 이상이나 늦췄다. 승객을 채워야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무관의 제왕'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한국이었다면 혼을 내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떠듬거리는 영어였다. 항공회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알아듣지도 못했다. 자기 나라 '무관의 제왕'이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투덜댔다.
결국 출발시킨 것이 조그만 비행기였다. 24인승 경비행기였다. 승객이라고는 김봉투 기자 일행을 빼면 흑인 청년과 할머니 부부 정도가 전부였다. 그 작은 비행기가 거센 바람을 타고 마구 흔들렸던 것이다.
캐나다의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기고 있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겨우 안도감을 느꼈다. 어쨌든 '죽을 위기'는 지나간 것이다.
한 기자가 버럭 소리쳤다.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김봉투 기자 일행은 그 때까지 배가 고픈 것마저 잊고 있었다.
목숨을 건 '나이애가라 관광'이었다. '취재'에 목숨을 걸어야할 기자들이 '유흥'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한심한 기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