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낑'은 자그마치 1,000달러나 되었다. '낑'이라면 제법 받아본 김봉투 기자도 흐뭇할 정도였다. 해외에서 받는 '낑'이라 더욱 그랬다. 이처럼 거액의 '낑'을 선뜻 내놓을 장관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봉투 기자는 장관이 아마도 '로비스트'를 만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김봉투 기자는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낑'이었다. 지갑에 빳빳한 100달러 짜리 10장이 채워지니 마음부터가 느긋해졌다. 1,000달러 남짓했던 지갑 속 '재산'이 갑자기 곱절로 늘었으니 그럴 만했다.
장관은 떠나기에 앞서서 또 한 가지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각 신문사 특파원들과의 회견이었다. 특파원들에게 '한미 현안'을 브리핑한 것이다. '특별 기자회견'이라는 명분이었다. 물론 보도자료를 준비했다가 발표했고, 기사는 한국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장관은 용의주도했다. 아주 세심했다. 수행 기자에게는 '낑'으로 양해를 구하고, 현지 특파원들과는 기자회견까지 가진 것이다. 물론 특파원들에게도 '낑'을 빼먹지 않았다. 특파원들에게 나눠준 '낑'에 관해서는 비서관이 전해주었다.
"장관께서 각 신문사 특파원과 회견하면서 '낑'을 300달러씩 주었다. 수행 기자에게 준 1,000달러는 장관을 도와줬기 때문에 고맙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낑'이다. 비밀로 해달라. 만약 '낑'을 차별해서 내놓은 사실이 특파원들에게 알려지면 장관 입장이 난처해진다."
이랬던 것이다. 장관은 속된 말로 표현하면 '약아빠진' 사람이었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노련한' 사람이었다.
김봉투 기자는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워싱턴 특파원에게 전화를 했었다. 모처럼 미국까지 왔으니 만나보고 돌아가는 것이 '예의'였다. 게다가 워싱턴 특파원은 김봉투 기자에게는 가까운 선배 기자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적어간 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특파원은 받지 않았다. 받는 대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성 메시지를 남기라는 목소리였다. 김봉투 기자는 특파원에게 메시지를 남겨놓은 다음에 '외국' 여성의 희한한 춤을 구경하러 갔었다.
원래 신문사라는 곳은 선배 기자가 돈을 쓰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전통이다. 밥 먹고, 술 먹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후배 기자가 계산하는 법은 없다. 후배 기자가 돈을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예의에 어긋난다. 모처럼 '낑'이 생겼다고 미리 신고하고 나서 돈을 낼 경우에도 '실례'가 된다. 선배 기자의 자존심을 긁는 것이다.
왜냐하면 '낑'은 후배 기자만 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배 기자는 후배 기자보다 '낑'을 받아본 경험에서도 앞서는 것이다. 기자생활을 해도 훨씬 오래 했다. 그래서 후배 기자가 감히 선배 기자 앞에서 계산을 하면 안 된다. 후배 기자는 선배 기자와 함께 술을 마시면 당연히 얻어먹는 게 정상이다. 계산은 선배 기자의 몫이다. 항상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불문율'이다.
그러면 선배 기자만 손해보는 것 아닌가. 그렇지도 않다. 후배 기자도 세월이 지나면 선배 기자가 된다.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얻어먹을 수 없다. 새로 들어오는 후배 기자에게 술을 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평한 '불문율'이다.
어쨌거나 김봉투 기자는 선배 기자인 워싱턴 특파원을 만날 수 있었다. 몇 년만에 만나는 것이다. 당연히 한 잔이 없을 수 없었다. 바쁘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한 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특파원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빠듯한 워싱턴 체재비로는 술 한 잔 마시기도 힘들다고 '엄살'을 부린 것이다. 방금 장관이 준 300달러의 '낑'이 분명히 지갑 속에 들어 있을 것인데도 그랬다.
실제로 특파원은 고달팠다.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쥐꼬리 체재비로 가족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아이들 학교도 보내야 했다.
가난한 신문사에서 얻어준 집은 빈약했다. 그 빈약한 집에 팩시밀리 한 대를 놓고 사무실이라고 하고 있었다. 변변한 사무실조차 없었다. 신문사 특파원은 '재택 근무'의 원조였다. 그래서 음성 메시지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잡일'이 많았다. 김봉투 기자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을 수 없다. 김봉투 기자뿐 아니다. 신문사 기자들이 걸핏하면 해외출장이라며 찾아왔다. 일일이 만나줘야 했다. 기자는 물론, 신문사의 높은 사람, 낮은 사람도 찾아왔다. 동료도 찾아왔다.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가 아는 척하며 찾아올 때도 있다.
기자는 더군다나 싸돌아다니는 게 직업이다. 직업 덕분에 이래저래 알게 된 사람도 많다. 발이 좀 넓은 것이다. 그렇게 알게된 사람들도 워싱턴에 들르면 연락을 해올 때가 가끔 있다. 그러면 만나줘야 한다. 시간이 없다거나, 핑계를 대면서 피하기라도 하면 뒤통수에 간지러운 소리가 바로 들리는 것이다.
또한 찾아오는 사람 가운데 현지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몇 년 째 생활하는 특파원도 잘 모르는데 초행길인 사람이 알 재간은 없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는 '관광가이드'까지 해줘야 한다. '파트너'까지 구해달라고 재롱을 떠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도 본연의 '임무'인 기사까지 써서 신문사로 보내줘야 한다. 밖에서 보면 그럴 듯한 신문사 특파원이지만 실상은 피곤한 것이다. '선망의 대상'인 신문사 특파원의 생활은 이랬다.
그런 특파원에게 '거금' 300달러의 '낑'이 생겼다. 모처럼 생겼으니 아껴야할 '낑'이었다. 그런 판에 김봉투 기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술을 한 잔 하자고 한 것이다. 거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체재비를 탓하며 '엄살'을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특파원은 김봉투 기자의 지갑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계산은 김봉투 기자가 자발적으로 하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주머니가 두둑했으니 '불문율'을 깰 만했다. '외국' 여성에게 또 '1달러'를 찔러줬다. 그렇게 회포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