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똑같이 닻줄을 풀고 노를 저었는데 조금 있다가 보니 옆에서 출발한 배는 벌써 강을 건너서 저쪽 나루에 도착하고 있었다. 반면 이규보가 탄 배는 아직도 이쪽 나루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규보가 까닭을 물었다. 함께 탄 사람이 대답했다. "저쪽 배에 탄 사람들은 술을 싣고 가다가 그 술로 노 젓는 사람을 먹였다. 그랬더니 힘을 다해서 노를 저었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겸연쩍은 얼굴로 한탄했다. "이 조그마한 강물을 건너는 데도 뇌물을 먹이고 안 먹이는 데 따라서 빠르게 건너고 느리게 건너는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바다같이 험한 벼슬길을 다투어 건너갈 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규보의 '주뢰설(舟賂說)'에 나오는 얘기다. 세상에 '맨입'으로 되는 일은 없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술'을 먹인 배는 쏜살같이 달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배는 속도를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기자들이 민원을 처리할 때도 그렇다. 기자들은 민원 부탁이 들어오면 우선 얼굴부터 찡그린다. 워낙 민원이 많아서 귀찮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 역시 퉁명스럽다. 마지못해서 처리해준다.
그렇지만 '맨입'으로 넘어가지 않는 수가 종종 있다. 어렵사리 부탁한 민원을 처리해주었으니 고맙다는 인사치레가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조그만 선물로 답례를 하거나, 하다 못해 소주라도 같이 마시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한다. 눈치가 좀 있는 사람은 '낑'을 들고 와서 찔러주기도 한다. 큰 민원을 해결해줬다면, 제법 그럴 듯한 방석집에서 먹자판 접대를 할 수도 있다.
어떤 기자들은 그런 것을 바라고 민원을 처리해주기도 한다. '맨입'으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무관의 제왕'이 관심을 가지고 몸소 뛰면서 처리해주는데 부탁한 사람으로서는 그대로 넘어가면 결례다.
담보 제대로 맡기고, 이자까지 또박또박 물어도 금융기관에서 대출 받기 어렵던 시절의 일이다. 어떤 기자는 본업인 기사 쓰는 일을 제쳐두고 단자회사만 찾아다녔다. 기업들의 어음을 할인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다녔다. '무관의 제왕'이 부탁하면 약해지는 것이 금융기관이었다. 들어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단자회사가 어음을 할인할 때는 '심사'를 했다. 심사 결과, '부적격업체' 판정이 나면 어음할인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무관의 제왕'이 부탁할 때는 달랐다. '부적격업체'가 '적격업체'로 둔갑했다. 이 기자는 그런 '둔갑술'을 수두룩하게 부렸다.
이 기자는 이런 '부업'으로 재미를 좀 봤다. 하지만 얼마나 재미를 봤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절대로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부업'으로 얻은 '소득(?)'은 헤프게 사라졌다. 단지 펑펑 쓰는 재미를 좀 봤을 뿐이다.
서울 시내 어느 곳에 경찰서가 새로 생겼을 때다. 짓다 보니 경찰서 건물에 뒷문이 없었다. 경찰서를 방문하는 시민들이 불편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불편한 것은 경찰서 뒤쪽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뒷문만 생긴다면,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져서 장사가 쏠쏠하게 될 것 같았다.
장사하는 사람 가운데 기자들 생리를 꿰뚫은 사람이 있었다. '업자 대표'를 선정해서 대뜸 기자실을 찾았다. 그래야 일이 빨리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업자 대표'는 노골적으로 얘기했다. 경찰서에 뒷문을 내주면 '낑'으로 답례를 하겠다고 했다.
'낑'에 굶주려 있던 기자가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곧바로 경찰서장에게 주장했다. 뒷문이 없어서 기자들이 기자실을 출입하는 데 불편하다고 했다. 시민들도 앞문으로 돌아서 들어와야 하는 바람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업자' 얘기만 쏙 빼고 말했다.
시민들은 둘째치고, 기자들이 불편하다는데 들어주지 않을 경찰서장이 아니었다. 즉시 뒷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기자들은 소정의 '낑'을 받아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누이 좋고, 매부 좋았다. 기자 좋고, '업자'는 더욱 좋았다.
터무니없는 민원 때문에 고민에 빠진 기자도 있었다. 어떤 기자는 신문사 고위층으로부터 아파트를 '리모델링'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리모델링 잘하는 전문업자를 소개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돈을 내고 리모델링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를 지은 건설회사에 압력을 넣어서 '공짜'로 리모델링해달라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구악(舊惡) 기자'의 지시였다.
무리한 민원이었다. 제아무리 '무관의 제왕 끗발'이라도 곤란했다. 끗발이 먹힐 만한 건설회사라고 해도 기자의 양심상 들어줄 수 없는 민원이었다. 기자는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건설회사에는 말도 건네지 못했다. 신문사 고위층은 이 기자를 좌천시켰다. '보복인사'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떤 기자는 선배 언론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민원을 들어줘야 했다. 신문사를 그만둔 선배가 잡지를 발행하면서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하소연'한 것이다. 새로 창간된 잡지라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 내용도 신통치 못했다.
선배 언론인의 부탁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에 구독해달라고 '권유'를 했더니 판매 부수가 상당히 늘게 되었다. 선배 언론인이 고맙다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자고 연락해왔다. 그 정도쯤이야 하고 갔더니 소주가 아니었다. 방석집에서 '파트너'를 앉히고 양주를 배가 터지도록 마셔야 했다.
반면, 기자의 구독 권유를 받아들인 '구독자'는 '생돈'을 날려야 했다. 잡지는 종이가 두꺼워서 휴지로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