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 기자실에는 '단비(團費)'라는 것이 있었다. '기자단'에 매달 나오는 돈이라 '단비'라고 했을 것이다. 단비는 마치 '월급'처럼 다달이 출입기자에게 지급되던 '낑'이었다. 그 규모는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물론 출입처마다 출입기자에게 지급하는 단비는 차이가 났다. 이른바 물 좋은 출입처와, 물이 별로 좋지 못한 출입처의 차이였다.
김봉투 기자의 경우 출입처에서 매달 3만 원의 단비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월급이 20만 원도 채 되지 않을 때였으니 적지는 않은 금액이었다. 그래도 그 단비를 받아서 택시를 타고 출입처를 왕복하며, 소주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용돈이 될 만한 금액이었다.
더욱 오래 전에는 '주말자금'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매달 단비가 나오는 게 아니라, 매주마다 단비가 나왔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주급'을 받는 식이었다. 기자들은 일주일마다 또박또박 '낑'을 받아서 흥청거렸다.
매주 나오는 '주말자금'이 어쩌다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기자들은 관리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관리들은 주말에 골프 치러 다니면서 기자들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는 호통이었다. 그러면 부랴부랴 '낑'을 구해서 기자실에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하지만, 단비는 별것 아니었다. 단비 따위는 그야말로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단비 외에도 '부정기적으로 나오는 낑'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여름휴가철이 되면 '휴가 낑'이 나왔다. 추석이나, 연말이 되면 '추석 낑', '연말 낑'이 나왔다. 출입처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행사 낑'이 나왔다. 출입처에 현안이 있을 때는 기관장이 기자들과 밥이나 술을 먹으며 '낑'을 내놓기도 했다. 출입처를 떠나면 '전별금 낑'도 받았다.
이랬으니, 매달 받는 단비에다가 부정기적으로 나오는 여러 가지 '낑'을 모두 합치면 그 규모가 대단했다. 단비는 월급, 부정기적인 '낑'은 보너스였던 셈이다.
한 기자가 한 군데의 출입처만을 맡아서 출입할 때 이랬다. 한 기자가 여러 군데의 출입처를 맡아서 출입할 경우는 더욱 대단했다. '낑'의 규모도 두 배, 세 배로 따라서 늘어났던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단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떤 기자가 경제단체 한 곳만을 맡아서 출입한다면 그 기자의 '낑'은 '단비+부정기적 보너스'에 그치게 된다. 그렇지만 그 기자가 경제단체 두 곳을 맡아서 출입한다면 '낑'은 곧바로 '곱빼기'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기자가 있었다. 이 기자는 3∼4군데의 출입처를 맡고 있었다. 신문사의 형편 때문에 기자 숫자를 늘리지 못해서 한 명의 기자에게 여러 군데의 출입처를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이 기자는 출입처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기도 힘들었다. 출입처마다 가끔 내놓는 '보도자료'나 받아서 처리할 정도였다.
이 기자는 그러면서도 '낑'이 나오는 날만큼은 빼먹지 않고 출입처에 나타났다. 어느 한 출입처에서 단비가 나을 때쯤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단비 봉투'를 받아 챙겼다. 3∼4군데의 출입처를 담당했으니 한 달에도 3∼4번의 '단비 봉투'를 받아 챙길 수 있었다. 이것만 따져봐도 신문사에서 받는 봉급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다 부정기적인 '낑'도 나왔다. 그럴 때도 반드시 봉투를 챙겨갔다. '봉투'를 받다보면 한 달이 순식간에 흐를 정도였다. 그랬으니 기자가 아니라 마치 '수금사원'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봉투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낑 수입'이 한 군데의 출입처만 맡고 있는 기자와 비교하면 3∼4배나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기자는 게다가 가끔 지방 출장, 해외 출장도 다녀오곤 했다. 그럴 때면 미처 '수금'하지 못한 '봉투'가 쌓이기도 했다. 한 군데 출입처에서 여러 개의 '봉투'를 한꺼번에 찾아가기도 했다.
휴가철에 나오는 '휴가 낑'이나, 추석, 연말 등에 나오는 '추석 낑', '연말 낑'도 마찬가지로 3∼4 군데의 출입처에서 모두 챙길 수 있었다. 아주 '짭짤한' 기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짭짤한 낑'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술을 퍼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기자는 여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비가 사라진 것은 아마도 전두환 정권 초기였다. 살벌한 군사정권이 사회정의를 바로잡는다며 마구 설치는(?) 바람에 '낑'이라는 것도 쑥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기자들은 한동안 배가 고파야 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시 '낑'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지만, 단비라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부정기적인 '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