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투 기자가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간단하게 한 잔 걸치고 도착했으니 제법 늦
은 시간이었다. 그 늦은 시간에도 아내는 불조차 켜지 않은 컴컴한 방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김봉투 기자는 한 잔 걸친 터라 별다른 생각 없이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나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주춤해야 했다. 아내의 눈에서는 파란 불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분명히 싸우자는 태도였다. 웬 일인가 묻기도 전에 아내의 잔소리가 먼저 쏟아졌다.
"기자 아파트가 도대체 뭐야?"
김봉투 기자는 '아뿔싸'했다. 아내에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응, 그런 거 있어. 집 없는 기자들한테 주는 아파트야. 우리랑 관계없는 거야."
이렇게 얼버무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누군가. 기자의 아내다. 기자의 아내답게 이미 모든 '취재'를 마치고 있었다. 그것도 완벽한 취재였다. 아내는 취재를 끝내놓고 남편을 혼내기 위해 눈에 파란 불을 켜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우연히 복덕방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부동산 소개업자였다. '무작위'로 다이얼을 돌리다가 연결되었을 것이다.
복덕방은 아내에게 기자 아파트라는 것이 매물로 나왔다고 했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노른자위 땅에 짓는 그럴 듯한 대단위 아파트라고 했다. 프리미엄이 800만 원이나 붙어 있는데 앞으로도 더욱 오를 것이라고 했다.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사라고 '꼬셨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약이 바짝 올랐다. 이곳저곳 '취재'를 해봤다. 취재 결과, 기자 아파트란 집이 없는 무주택 기자를 위해서 '특별 분양'해주는 아파트였다. 더구나 그 아파트를 노른자위인 강남에 짓는다고 했다.
무주택 기자를 위한 것이지만 김봉투 기자의 신문사 동료인 누구, 누구, 누구 기자 등은 아파트를 분양 받은 사실도 알아냈다. 그 동료 기자들은 모두 집이 있는 기자들이다. 김봉투 기자의 19평 짜리 아파트보다 넓은 집이 있는 기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분양 받았는데, 어수룩한 김봉투 기자 혼자서만 분양을 포기하고 아내에게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당시 김봉투 기자의 봉급은 40만 원 남짓했다. 800만 원의 프리미엄은 무려 20개월 동안 손가락만 빨아가면서 모아야 할 큰돈이었다. 보너스를 제외한다면 그랬다.
그러니 아파트를 분양 받은 기자는 단숨에 20개월 봉급에 해당하는 '엄청난 낑'을 챙기는 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프리미엄도 올라서 더욱 불어날 '낑'이었다. 그런 '거액의 낑'을 포기했으니 아내가 배앓이를 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분양과 동시에 매물로 나온 기자 아파트는 적지 않았다. 어떤 기자는 평수가 좁아서 부모를 모시기 어려울 것 같다며 매물로 내놓았다. 또 어떤 기자는 아파트 1층에서는 살기 불편할 것 같다며 매물로 내놓았다. 조금 솔직한 기자는 '로열층'이 아니라며 매물로 내놓기도 했다. 핑계와 변명이 난무했다. 집이 있는 기자의 변명이고, 핑계였다. 그들은 모두 '거액의 낑'을 챙겼을 것이다.
집이 '정말로' 없는 무주택 기자만 그런 변명이나 핑계를 늘어놓지 않고 입주해서 살았다. '낑'도 챙길 줄 모르는 기자들이었다.
당시 기자 아파트는 '기자'라는 불특정다수에게 특혜를 준 것이었다. 범위를 축소하면, 기자협회 회원이면서 무주택인 기자에게 특혜를 줬다. 기자협회 회원이 아닌 기자도 있었지만, 그런 기자는 특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기자협회는 '언론통폐합' 때 해산했었다. 그랬다가 다시 부활했다. 전두환 정권은 기자협회에 병을 주더니 슬그머니 약을 보태준 것이다. 약한 기자협회였다.
'거액 낑'은 또 있었다. 80년대 초 증권시장에 '큰손 명단'이 나돈 적이 있었다. 증권관계기관에서 조사한 명단이었다. 명단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 명단 가운데 어떤 기자의 이름도 '당당하게' 들어 있었다. 기자가 증권시장에서 큰손 노릇을 한 것이다. 굴리는 자금 규모가 '몇 십억'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몇 백억' 정도나 되었을 것이다.
'낑'은 현찰로만 받는 게 아니었다. 아파트로도 받고, 주식으로도 받는 것이었다.
어떤 증권회사는 기자들에게 돈을 조금만 맡기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면 '정책계좌'에 편입시켜 알아서 굴려주겠다고 했다. 용돈과 술값 정도는 걱정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증권회사는 자기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정책계좌'에 편입한 기자의 돈만큼은 알아서 불려줬다.
물론 '정책계좌'에는 기자들의 돈만 포함되는 게 아니었다. 증권회사는 힘 좀 있는 사람의 돈을 끌어들여 '정책계좌'에 편입시켰다. 그러면 힘 좀 있는 사람은 자기 회사 편이 될 수 있었다. 기자도 그 힘 좀 있는 사람 축에 들었던 것이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패스 21 사건' 때에는 언론계 '인사' 20여 명의 명단과 보유 주식 수까지 나돌았다. 아주 구체적으로 나돌았다. 명단에는 신문사 사장과 사장의 부인도 들어 있었다. 나이 든 기자는 물론이고, 나이 30을 갓 넘긴 기자도 '인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기자라는 직업은 젊어서부터 '인사'가 될 수 있는 대단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패스 21 사건'은 주식 낑'이 진화한 사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