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투 기자가 근무하는 신문사의 부서에는 '관례'가 있었다. '전통' 비슷하기도 했다. 기자가 출장을 다녀오면 소속 부원들에게 한 잔을 내는 것이다. 이를 '출장 보고회'라고 했다. 부장, 차장 등 데스크가 출장을 다녀와도 마찬가지로 한 잔을 냈다. 지면을 담당하는 편집자도 참석해서 같이 마셨다. 따라서 소속 부원 가운데 누군가가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에는 아무도 저녁 약속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 술을 산 것은 아니다. '낑'이 풍성하던 시절이었다. 출장을 가면 으레 '낑'이 생겼고, 돌아와서는 그 '낑'으로 술을 사면서 "신나게 놀고 왔다"고 부원들에게 '보고'를 한 것이다.
출장을 다녀와서 한 잔 내는 규모는 제각각이었다. '낑'이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 달랐다. '낑'이 두둑하게 생겼을 때는 양주를 시켜가며 제법 푸짐하게 '보고회'를 했다. '새마을 출장'을 다녀왔으면 삼겹살에 소주로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발동'이 걸리면 2차, 3차를 가서 새벽까지 퍼마시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툼했던 '낑'을 하룻저녁에 모두 털어 버리기도 했다. 2차, 3차를 가면서 헤매다보면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흥청망청해도 누구하나 돈 떨어지겠다고 걱정해주는 일은 없었다. 출장을 다녀와도 애당초 '낑'을 얼마나 받았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받았으면서도 받지 않은 척하는 것이 '낑'이었다.
퍼마시다 보면 '낑' 받은 돈으로는 모자라서 외상으로 달아놓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태연했다. '낑'이란 어차피 또 생길 것이었다. 그까짓 외상값쯤은 다음에 '낑'을 받아 해결해주면 그만이었다. 봄, 가을 출장을 가면 '낑'이 생길 것이고, 여름 휴가, 추석, 연말 등에도 '낑'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 '낑'은 아무리 퍼마셔도 계속 솟아나는 샘물이었다.
기자들은 이런 식으로 신문사 주변 몇몇 단골술집의 매상을 짭짤하게 올려줬다. 신문사 주변의 단골술집은 불황을 모르는 '알토란 장사'였다. 기자들의 출장이 잦았고, 그 때마다 몰려와서 매상을 올려줬으니 장사가 잘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기자는 이를 '소득재분배'라고 우기기도 했다. '낑'을 내놓는 사람들은 힘 좀 있는 '가진 자'들이다. 기자들은 그 '가진 자'들이 준 '낑'을 받아서, 별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해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낑'을 받아 이곳저곳 뿌리고 다니면 '덜 가진 자'들의 소득이 그만큼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이다.
'낑'을 적절하게 취재에 이용하는 기자도 있었다. 출입처의 기관장이 주는 '낑'을 받아서 그 출입처의 '정보원'에게 '재분배'한 것이다. '정보원'은 대체로 기관장의 눈치를 덜 보는 말단직원들이었다. 기관장이 잘 봐달라고 준 '낑'으로 '정보원'과 만나 술을 마시면서 잘 봐주지 않을 사항만 골라서 취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득재분배'란 주장은 억지 논리였다. '소득'이라면 세금을 내는 게 정상이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낑'을 받았다고 그에 따른 세금을 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김봉투 기자가 '낑'을 받으면서 세금을 내본 적이 꼭 한번 있기는 했다. 출입처를 떠날 때 '전별금'이라며 주는 '낑'을 받고 보니 세금을 공제하고 나왔던 것이다. 전별금은 30만 원이었지만, '실수령액'은 24만 원쯤이었다. 세금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봉투 속에는 10원 짜리 동전 몇 개까지 들어 있었다. 도대체 '낑'에서도 세금을 떼냐고 물었더니, '원고료'라는 대답이었다. 글자 한 자 쓰지 않고 받아본 희한한 '원고료'였다.
어쨌거나 '낑'은 떨어질 만하면 또 생겼다. 그러면 기자들은 또 퍼마시며 키득거렸다. 소득을 '재분배'했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자주 마시다보면 주량이 늘어나는 법이다. 게다가 출입처에서도 기자들과 자주 술자리를 만들었다. 걸핏하면 '폭탄주'였다. 아니면 방석집이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젖게 되었다. 퇴근할 때 한 잔 걸칠 일이 없으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낑'이 생길 때가 되었는데도 소식이 없으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퍼마시는 게 생활화된 데다가, '출장 보고회' 때 달아놓은 외상값도 갚아야 하는 것이다.
'낑'이 떨어지면 맥도 풀렸다. '낑'맛을 잊지 못하게 되었다. 기자의 지갑은 항상 두툼해야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낑'은 마약이었다.
'낑'은 독약이기도 했다. 결국 김봉투 기자는 위장을 버리고 말았다. 기사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직업병'이라고 변명하지만, 실제로는 위장이 독한 술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늘그막을 위장약으로 버티게 되었다.
중국 송나라 때 학자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손보(孫甫)라는 관리에게 어떤 사람이 좋은 벼루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벼루 가격이 3만 전이나 된다고 했다. 이 벼루가 어째서 그렇게 비싼가 물었다. 벼루를 바치려던 사람이 대답했다. 벼루는 물을 부었을 때 마르지 않는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 이 벼루는 입김 한 번만 불어도 그 입김이 곧바로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린다. 그 정도로 마르지 않는 벼루다. 상품 중에서도 상품인 벼루다. 그러자 손보가 말했다. 벼루에 하루종일 입김을 불어대면 물 한 통쯤 생기겠구나. 그 물 한 통 값이라고 해봐야 3전에 불과하다. 그런 물건을 무엇에 쓰겠는가. 손보는 끝내 벼루를 받지 않았다."
김봉투 기자는 손보와 달리 마약이고 독약이기도 한 '낑'을 애당초 물리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