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이 다 된 서울 종로의 한식집 한일관이 사라진다.
17일 한일관에 따르면, 청진 재개발지구가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5월말까지만 영업하기로 했다는 것.
한일관은 10월쯤 강남에서 문을 열어 3년으로 예정된 재개발기간 영업을 계속한 뒤 재개발이 마무리되면 현재 장소 위에 세워질 신축 건물 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강남 어느 지역으로 갈지 등 향후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일관은 설명했다.
한일관은 1939년 제일은행 본점 뒤 현재의 자리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신우경 할머니가 문을 열었고 곧 독특한 음식맛으로 장안의 화제가 됐다.
당시만 해도 대형음식점이 별로 없어 유력인사들의 회식 장소로 주로 애용됐다. 음식값이 상대적으로 비싸 서민들은 찾기 힘든 곳이었다. 중산층이라고 해도 곗날이나 생일 등 특정일에만 이용할 수 있는 고급 음식점으로 인식돼 왔다.
신우경 할머니가 작고한 뒤에는 딸 길순정 씨가 음식점을 이끌어 왔다. 길씨가 작고한 후에는 딸 김이숙(47), 김은숙(44) 자매가 3대를 이어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한일관은 사세 확장에 따라 1950년대 초 명동에 분점을 내 명동지역 직장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으나 명동이 패션과 금융 중심지로 변모하는 등 세태가 변화함에 따라 1997년 문을 닫고 종로 본점에만 집중했다.
한일관의 간판 메뉴는 한식 불고기. 지글지글 익어가는 불고기를 앞에 두고 직장인들이나 가족이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은 익숙하다. 정국이 어수선할 때에는 시국 성토장이 되기도 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따라 한일관에서 가끔 불고기에 냉면을 먹었다는 50, 60대는 지금 단골이 됐다. 김형석(59. 서울 강남구) 씨는 "어머니가 곗날이면 한일관으로 데리고 가 불고기와 냉면을 사주셨다"며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한일관은 정ㆍ재계 주요인사들의 단골 음식점으로 자리잡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없이 단골 손님이었고 매년말 보신각 제야의종 행사에 참여하는 서울시장은 한일관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특히 현대 정씨 일가의 단골 음식점으로도 유명하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돌아가시기 전 매주 1차례 이상은 한일관을 찾았고 정몽구 현대ㆍ기아자동차 회장은 해외출장시 공수된 한일관의 육수와 만두를 즐겼을 정도다.
이런 탓에 대지 850평 위에 3층 규모(건평 300평)로 지어진 한일관은 항상 붐빈다. 360개의 좌석이 모자랄 정도여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한일관이 입맛이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고 원산지를 분명히 표시하는 등 성실과 신의의 바탕 위에 영업을 하기 때문. 된장찌개는 다섯 가지 된장을 적절히 섞어 끓이고 있다고 한다.
한일관은 종업원들을 각별히 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부터 1년간 진행된 리모델링 기간 종업원들에게 급여를 제공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후 어려웠을 때에도 종업원 강제 해고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장기 근속자가 유난히 많다. 장완기(73) 씨는 18세 때 한일관에 입사해 지금까지 50년 넘게 주차장 관리를 하고 있다. 최용환(73) 씨도 40여년 간 주차장 일을 맡고 있다.
조리실 고문으로 일선에서 한 걸음 물러난 박성순(64) 씨는 15세 때부터 한일관에 일했으니 근무경력 50년째다. 전체 종업원 90여 명 가운데 10년 이상 장기근속자가 30~40%에 달할 정도로 고용이 안정돼 있다.
이상근(37) 관리과장은 "자체 소유 땅에 건물을 짓고 영업을 하기 때문에 재정이 안정적"이라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관은 최근 종업원들에게 강남 이전 계획을 발표하면서 종업원들에게 함께 일하자고 당부했다. 대부분 받아들이는 분위기지만 집이 너무 먼 종업원들은 고민 중이라고 한다. 강남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한일관이 지금의 명성과 전통을 이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