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선으로 급락하면서 그동안 고유가 압박에 시달려온 우리 경제가 좀 기운을 차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번지고 있다.
정부가 올 하반기 경제운용계획을 짜면서 전제로 한 국제유가 수준에 실제 유가가 접근하면서 여러 거시경제 목표의 달성 가능성도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최근의 유가 하락이 세계적인 경기 불황에 따른 석유 수요 감소가 결정적인 데다 아직 지정학적 요인이나 허리케인 변수 등이 남아있다며 섣부른 낙관을 경계했다.
◇ 국제유가, 정부 전망치까지 떨어져
기획재정부가 지난 1일 내놓은 하반기 경제운용계획의 전제는 국제 유가의 경우 중동산 두바이유를 기준으로 올해 연평균 110달러였다. 하반기로만 따지면 120달러다.
엄격히 계산하면 상반기 평균이 104달러 수준이었기 때문에 연평균 110달러가 되려면 하반기에 116달러까지 떨어져야 한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가격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배럴당 145.78달러를 정점으로 하락세로 돌아서 29일에는 122.19달러까지 내려 보름 만에 배럴당 23.59달러 급락했다. 장중 한때 배럴당 120.75달러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두바이유는 일반적으로 WTI에 비해 거래가가 5달러 가량 낮기 때문에 WTI가 현재 수준을 유지하면 두바이 가격은 점차 하락 요인을 반영, 조만간 116달러에 근접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WTI가 지난 11일 장중에 배럴당 147.2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때만 해도 유가에 대한 전망은 매우 안 좋았고 3차 오일쇼크 위기감이 엄습하면서 국내 경제는 4% 성장 달성도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다.
전문가들은 유가 급등세를 부추겼던 투기자금들이 최근 석유제품 수요 감소에 무게를 두면서 투자전략을 바꾸고 있어 급락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유가가 올라가면 국내 물가가 따라서 올라가고 이는 소비 위축과 투자 감소를 불러옴으로써 나아가 성장률까지 갉아먹는 구조가 되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경제운용이 매우 어려워진다"면서 "고유가가 지속되면 경상수지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재정을 털어 서민들을 지원해야 하지만 유가가 하락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없이 반길만한 소식"이라고 말했다.
◇ "한국경제에 숨통".."낙관은 일러"
전문 연구기관들은 국제 유가가 10% 떨어지면 경제성장률은 0.2~0.3% 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유가 하락을 좋은 소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 유가 상승 국면이 완전히 마무리됐다고 보기 어려운데다 세계 경기의 둔화 위험이 부각된 만큼 상황을 낙관하기 이르다는 평가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유가가 하락세를 보이면서 정부 당국도 잠시나마 숨 돌릴 여유를 찾고 있다"며 "다만 세계 경제의 둔화라는 또 다른 악재가 부각되고 있는 만큼 마음을 놓기는 어려운 국면"이라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초고유가 국면에서 벗어난 데 대해 일단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며 "세계 경기 둔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경착륙으로 연결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곽수종 수석연구원은 "유가 하락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 배경을 들여다 보면 그리 환영할 일은 아닌 것 같다"며 "수출 의존도가 매우 높아진 상황에서 세계 경기 둔화는 한국 경제의 주 엔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유가는 다소 주춤하고 있지만 앞서 축적된 물가 상승 압력이 분출될 가능성이 여전하다"며 "물가 관리에 더욱 신경써야 할 때"라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 "유가 하락 전환 판단은 시기상조"
국제 유가가 하락 추세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 따르면 7월 넷째 주(22일 기준) NYMEX의 투기자금 순매수포지션(옵션 포함)은 7만3천계약으로 전주에 비해 17% 줄었고 올해 최고치였던 2월의 15만7천계약에 비해서는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국제금융센터 오정석 부장은 "선물 계약만 보면 숏포지션으로 전환됐고 순매수 포지션이 크게 줄어 투기세력들은 이익실현에 나서면서 유가 하락을 점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다만 이란 핵 문제와 나이지리아의 무장세력 등 지정학적 위험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허리케인 시즌을 앞두고 있는 등 유가가 다시 급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정석 부장은 "수급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았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남아있다"며 "7월 중순 이후 시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짧은 시간에 급락했기 때문에 추세적으로 하락세로 전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지훈 수석연구원은 "하반기에 초고유가 추세가 완화되면서 국제 유가는 상고하저의 흐름을 보일 것이라는 기존의 전망을 유지한다"면서 "다만 지정학적 위험과 허리케인 변수에 따라 단기적으로 다시 배럴당 150달러로 급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석유공사 구자권 해외조사팀장은 "수요 둔화는 유가 안정에 긍정적이지만 이란 문제와 나이지리아 산유지역의 테러, 미국 경기 침체에 따른 달러화 약세 등 유가 상승 요인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