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만드는 신문=백진주 기자] 이건희 회장이 지난 24일 삼성전자로 돌아왔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 삼성전자도 위기를 맞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 경영일선에 복귀했다는 설명이다.
이 회장의 복귀로 벌써부터 삼성전자의 신사업 추진 방향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성전자, 더 나아가서는 한국 전자산업의 발전을 이끌어온 그의 혜안이 이번에는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가 궁금해서다. 이 회장의 복귀가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리는 건 시대를 앞서는 안목으로 커다란 밑그림을 그려온 그의 역할이 삼성전자의 눈부신 성장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삼성전자와 LG전자로 대표되는 한국전자산업이 불과 10여 년 만에 세계 제일의 전자강국 일본을 추월한데는 오너이자, 최고경영자인 이건희 회장과 구본무 회장의 리더십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국난으로 일컬어지던 IMF 위기를 이겨내고, 일본 전자업계를 따돌린 지난 세월, 한국 전자산업의 두 거인은 어떤 화두를 던져왔을까?
'중요한 것은 인재'..'R&D'로 밀레니엄을 열다
2001년 5월 28일 오후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이건희 회장 주재로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코닝 등 전자4사 사장단 회의가 열렸다. IMF위기를 극복하면서 반도체를 비롯한 설비투자 확대여부가 이날의 주요 안건이었다. 특히 반도체사업에서는 선제적 투자가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이날 회의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이 주문한 것은 설비투자가 아니었다. 이 회장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반도체 라인을 증설해 투자 리스크를 안기 보다는 R&D와 기술인력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어려운 시기일수록 핵심인력과 국내외 우수 기술인력을 조기에 확보해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R&D투자와 기술인재 확보에 대한 이 회장의 발언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1993년 런던 회의부터 줄곧 강조해온 키워드 중 하나다. 이 회장은 “R&D는 보험이다. 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농부가 배가 고프다고 뿌릴 종자를 먹는 행위와 같다”고 표현했다. 또 "천재 1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 사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라"는 말로 핵심 인력의 발굴, 육성이 중요함을 강조하곤 했다.
삼성전자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일본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우수한 기술인력을 대거 충원해 R&D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다.
R&D에 대한 관심을 따지자면 구본무 LG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IMF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0월 LG그룹 연구개발현황보고가 열렸다. 구 회장은 이 자리에서 외형 위주의 성장을 추구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면 핵심기술 개발을 힘써 구조조정기를 오히려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회로 삼자고 역설했다. 구 회장은 "어려운 시기라도 인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불과 5개월 뒤인 1999년 3월에는 "R&D분야의 자생력을 더욱 강화하고, 필요하다면 선진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등 아웃소싱을 통해 주력업종으로 선정한 전자.통신분야의 승부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자"고 독려했다.
그해 10월과 11월에도 연구개발현황보고회와 임원세미나에서 우수연구 인력의 확보와 육성을 거듭 강조했다. 구 회장은 "1등 사업의 기반인 연구활동은 우수연구원의 확보와 자질에 성패가 달려 있다"며 "성과를 성취한 연구원들이 보람을 느끼고 더 높은 목표에 도전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고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주문을 내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이 설비투자 대신 R&D 강화를 요구했던 전자4사 사장단 회의 직후인 2001년 6월 구본무 회장은 세미나에서 참석해 “우리의 강점이었던 대량생산체제는 이미 중국의 급속한 성장으로 위협 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기술면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추격해오고 있다. 유일한 돌파구는 기술에 승부를 걸고 일등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R&D투자만큼은 줄이지 말 것을 경영진에게 당부했다.
"자만할 수 없다".. 디자인으로 고객의 마음을 훔치다
삼성과 LG가 LCD, PDP 등 디스플레이시장은 물론, 전세계 TV시장에서도 일본 업체를 따돌리고 1위로 올라서던 2005년 4월 14일. 세계 명품과 디자인의 중심인 이탈리아 밀라노에 이건희 회장과 주요 계열사 사장들이 집결해 디자인전략회의를 열었다.
이 회장은 이날 "명실공히 월드 프리미엄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디자인 브랜드 등 소프트 경쟁력을 강화해 기능과 기술은 물론 감성의 벽까지 모두 넘어서야 한다"고 천명했다. 특히 “상품 진열대에서 특정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라며 “이처럼 짧은 시간에 고객의 발길을 잡지 못하면 마케팅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며 기술경쟁에 더해 디자인 같은 감성 코드를 입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삼성은 이보다 앞서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디자인 강화에 힘써왔다. 1996년 이후 삼성은 ‘삼성인 상’디자인 부분을 신설, 해마다 최우수 디자이너를 선발해 직급 특진과 상금 포상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디자인 인력을 400% 이상 보강했고 그 결과 1천만대 이상 팔린 히트모델이 T100(일명 이건희폰), E700(일명 벤츠폰) 등이 탄생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회장은 그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 차원 높은 디자인 경쟁력을 요구했고, 삼성은 밀라노 회의 이후 '디자인 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제2의 디자인 혁명에 박차를 가했다. 휴대폰과 가전제품 시장에서 잇달아 명품 디자인 을 내놓으며 일본 업체를 본격적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이무렵부터 삼성전자는 LG전자와 함께 세계에서 양대 디자인 상으로 불리는 미국의 'IDEA'와 독일 'iF 디자인 상을 휩쓸면서 명실상부한 세계 제일의 전자업체로 부상했다.
구 회장은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해오던 개별제품 위주의 디자인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고객의 생활공간 전반에 새로운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총체적인 디자인에 힘을 쏟아달라"는 주문을 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감성의 벽을 넘으라는 이건희 회장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구 회장은 그 다음해 LG전자디자인경영센터를 다시 찾아 또 한 번 디자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구 회장은 "디자인이 미래 변화를 주도할 최고이 경쟁력이 될 것"이라며 "고객의 잠재된 니즈(needs)를 발굴해 고객의 생각보다 한발 앞서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는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해외 출장 때도 반드시 가전이나 휴대폰 전문매장을 찾아 LG제품과 경쟁 중인 글로벌 기업 제품들의 판매 현황이나 소비자 반응 등을 직접 살핀다. 특히 경쟁 제품의 디자인을 꼼꼼히 살피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구 회장의 디자인경영은 사업 전반에 그대로 반영,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복잡한 기능 대신 심플한 디자인을 강조한 블랙라벨 시리즈 ‘초콜릿폰’은 2005년 휴대전화 사업의 적자를 단박에 뒤집어 놓았다. LG전자의 휘센 에어컨이 5년 연속 세계 판매 1위라는 성과를 달성한 것 역시 디자인 강화의 결과다.
"위기가 기회".. 소프트 파워의 시대가 왔다
한국 전자산업은 최근 역풍을 맞고 있다. 디지털 TV에서는 삼성과 LG에 1위 자리를 내준 일본업체들이 설욕을 벼르며 3D TV를 중심으로 대반격에 나섰고, 휴대폰 시장에서는 애플의 아이폰 출시로 시작된 스마트폰 열풍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특히 아이폰의 등장은 휴대폰 시장의 패러다임이 하드 웨어에서 콘텐츠 위주로 옮겨가는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경영복귀와 함께 처음으로 한 말이 "지금은 위기다. 앞으로 10년내에 삼성전자의 주요 사업이 전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그같은 변화의 파고를 실감하게 한다.
삼성전자를 이같은 위기를 헤쳐갈 키워드로 '소프트 파워'를 꼽고 있다. 소프트 웨어와 콘텐츠 같은 무형의 경쟁력을 기르는 데 주력한다는 구상이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선언 당시 소프트 파워의 부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당시 이 회장은 “앞으로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진다. 소프트웨어 인력 1만명을 모아라"하는 말로 미래 경쟁력이 소프트웨어에 달려 있음을 예견했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는 이 부부분에서 아직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애플이 한국시장에 몰고 온 돌풍을 몸소 체험한 뒤 삼성은 소프트웨어 인력이 글로벌 경쟁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그룹차원에서 집중적인 인력확보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생산기술연구소,미디어솔루션센터(MSC),무선사업부에서 일할 소프트웨어 연구개발 경력직을 뽑는 공고를 냈다. 지난 몇달만 보면 매달 소프트웨어 경력사원을 뽑고 있다. 삼성종합기술원도 이공계 박사 인턴십 공고를 내면서 멀티미디어,SW,통신 분야를 가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룹 내 소프트 파워를 모으기 위해 삼성SDS 등 계열사들에도 시선을 돌리고 있다. 삼성은 최근 SDS의 일부 SW 전문인력들을 삼성전자로 스카우트한 데 이어 외부에 의존해온 SW 핵심 기술을 내부화시키기 위한 영입 작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 부족한 전문 인력을 해외에서 충원하기 위해 별도의 태스크포스(TF)도 만들었다. 삼성은 올해 3천500명의 소프트웨어 인력을 충원해 이중 절반을 삼성전자에 배치할 예정이다.
LG그룹에서도 조용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감지된다.
구본무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글로벌 시장의 통합과 고객의 영향력 증대로 기업 환경의 예측이 더욱 어려워지고 변화의 속도 또한 한층 빨라질 것"이라며 "이제는 변화를 빠르게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기도 어렵다"고 현재의 상황을 위기로 진단했다. 구 회장은 가치창출을 통해 변화를 주도해 나가야한다면서 "제품 개발, 사업모델 발굴, 마케팅 등 여러 분야에서 상상력을 발휘헤 다양한 실험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해 구 회장이 특별히 강조한 대목이 '자율과 창의의 조직문화'다. LG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콘텐츠와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급변하는 시장환경에 맞춰 조직 내부에 무형의 자산과 역량을 쌓자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이같은 차원에서 각 계열사별로 과거와는 다른 소프트 파워를 키우는 방안을 적극 모색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맞춰 LG전자는 소프트웨어 관련 인력을 유례없이 대거 충원하기로 결정했다. 올 상반기 600명의 신입사원을 선발할 예정인 LG전자의 충원 계획을 살펴보면 직군별로 R&D 인력이 80%, 마케팅 및 영업이 20%를 차지한다. 특히 소프트웨어 인력 비중은 R&D 부문의 40%로 총 채용인원의 30% 이상이 될 예정이다. LG전자 인사담당자는 "미래 성장동력과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IMF위기를 이겨내며 세계 최고의 전자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새롭게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을 어떻게 헤쳐갈지, 소프트파워를 내세운 두 최고경영자의 비전이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