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의 역할은 전체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경영진을 효율적으로 감시/견제하는 것이지만 실상 이들이 경영진과 맞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이는 대다수 금융회사에서 사외이사 선임시 최고경영자(회장, 은행장)나 최대주주가 이사 후보 추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금융권의 사외이사 면면을 보면 상당수 금융감독원이나 국세청, 기획재정부 등 전직관료 출신으로 이들이 경영진 감시보다는 회사와 관계된 '대외창구 역할'을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다.
금융전문가들은 소액주주들의 이사 선임권을 확대해 독립된 인사를 선임하고 사회적으로 전문성이 검증된 다양한 인력풀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이사의 '직무유기' 등에 대한 법적책임을 명시해 사외이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금융지주사․은행 사외이사 관료․교수 출신 대거 포진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KB․우리․신한․하나금융지주사와 은행, 보험, 증권사 등 국내 금융회사의 사외이사자리에 전직관료 출신과 교수, 변호사 등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이중 5월말 현재 4대 지주사별 사외이사 현황을 보면 KB금융지주(회장 어윤대)의 경우 총 8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관료출신 인사는 이경재 이사회 의장(은행감독원 부원장보, 기업은행장 역임)과 배재욱 변호사(대통령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가 있다.
또한 학계출신으로 김영진(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이종천(숭실대 경영학부 교수), 함상문(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고승의(숙명여자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조재목씨(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특임교수) 등 5명의 교수가 사외이사 직책을 맡고 있다.
우리금융지주(회장 어윤대)는 7명의 사외이사 중 관료출신은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김광의 현 예금보험공사 홍보실장 등 2명이다. 법조계 및 학계 인사로는 신희택 서울대 법대 교수, 이두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이헌 변호사 등이 있다.
신한금융지주(회장 한동우)는 10명의 사외이사 중 관료출신은 이사회 의장인 남궁훈 전 재경부 세재실장이 있다. 이밖에 권태은 나고야외국어대 교수, 김기영 광운대 총장, 윤계섭 서울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등 학계출신과 황선태 법무법인 로고스 고문변호사가 포함돼 있다.
하나금융지주(회장 김승유)의 경우 9명의 사외이사 중 김각영 현 이사회 의장 겸 법무법인 여명 고문변호사(검찰총장 출신), 정해왕 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 김경섭 전 조달청장, 허노중 키움닷컴 사외이사(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시중은행과 보험․증권사의 사외이사 인적구성 역시 관료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34개 주요 금융회사에서 사외이사로 재직 중인 145명 가운데 은행(6곳) 43명, 증권(9곳) 40명, 보험(6곳) 25명, 저축은행(7곳) 17명 등 무려 61명이 정·관계 고위직 출신이다.
사외이사 '거수기' 역할, 직무유기 관행 여전
은행권의 경우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지난해 초 '사외이사 모범규준'을 마련, CEO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다. 또 사외이사 임기는 2년 이내로 하되 연임시 1년, 최대 5년까지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주요 금융지주사와 은행들은 사외이사들의 활동 내역(이사회 참석여부, 안건 찬반 여부 등)과 보수를 은행연합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시해 투명성을 제고한 바 있다.
그러나 사외이사 모범규준안을 시행한지 1년 6개월이 지났지만 사외이사들이 여전히 제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은행연합회에 공시된 4대 금융지주사의 사외이사 활동내역을 보더라도 사외이사 대부분은 이사회에 부의된 안건에 대해 거의 100%에 가까운 찬성표를 던지고 있다. 출장 등으로 일부 사외이사가 불참한 경우를 제외하면 만장일치 의결이다.
금융계는 CEO의 영향력 하에 사외이사들이 선임되는 구조에서 사실상 이들이 독립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현재 대다수 금융지주사나 은행의 사외이사후보추천위(이하 사추위)에는 상근이사(지주사 회장 또는 은행장) 1명과 사외이사 4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사추위는 사외이사 후보를 추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최종 후보는 주주총회를 통해 확정된다.
이시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17일 한 월간지에 발표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발과 지배구조 이슈의 대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금융지주회사 CEO가 사외이사후보추천위(이하 사추위)에 포함된 비율은 80%에 달했다.
시중은행은 83%, 증권사와 생명보험의 경우 CEO가 100% 사추위에 참여했다. 이중 금융지주사 CEO나 주요 임원이 사외이사를 추천(내부추천)하는 비율은 54.17%를 보였고 시중은행 역시 51.94%로 나타났다.
KB지주 관계자는 "KB의 모형은 은행권 사외이사 모범규준에 적용할 만큼 제도적으로 잘 구축돼 있는데 다만 강정원 전 행장 때 일부 운영상의 문제가 있었다"며 "현재 이사회 의장과 회장을 분리하고 사추위도 독립성 차원에서 사외이사만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사외이사는 전문성 차원에서 회계나 경영, 법률 등의 정한 기준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쪽 분야의 전문가를 찾다보니 많은 교수들이 포함됐다"며 "원래 사추위에 후보 추천권이 있는데 지난번 사외이사 후보 선임을 할 때는 좀 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외부 인력으로 구성된 '사외이사 인선 자문단'을 운영한바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지주 관계자는 "사외이사 구성원 분포가 학계나 법률계 등 여러 분야에 포진돼 있으면 이사회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이사회에 올리기 전에 충분히 법적 리스크 등을 고려해서 안건을 올리는데 그간 민감한 이슈도 많지 않아 이사들 간에 큰 이견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소액주주 선임권 확대, 독립인사 인력풀 활용 필요
금융관련 전문가들은 금융권 사외이사들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저축은행 사태와 같이 경영진의 독단과 파행경영을 초래, 금융산업 전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지수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위원(미국 변호사)은 "사추위 위원으로 지주사 회장이나 은행장이 참여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다 보니 결국은 자기 의견에 반대할 수 없는 인사들이 대거 선임이 되고 있다"며 "사외이사 선임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의 선임권을 보다 확대해 외부에서 경영진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금융회사의 사외이사 그룹을 보면 전직 고위관료 출신이 많은데 주로 대외창구 역할을 담당하면서 일부에선 영전처럼 대우를 받고 있다"며 "현재 전직관료, 교수, 변호사 등 명망가 중심으로 뽑고 있는데 사회에서 검증된 '독립적인 인사'에 대한 인력풀을 만들면 금융회사도 장기적인 측면에서 득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아울러 그는 사외이사의 독립성 증대를 위해 교육기관을 마련, 사외이사의 주된 역할을 인지시키고 사법부 역시 책임을 방기한 사외이사에 대해 원칙대로 판결해 법적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국장은 "사외이사제도 취지는 회사를 감시․감독하고 사회적 공익을 대표하기 위함인데 현실에서는 사외이사가 경영진의 거수기 노릇이나 자본의 탐욕에 좌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대주주나 경영진의 탐욕이 발현되는 주주총회나 주주자본주의, 주주가치 경영의 철학에 대한 엄정한 잣대와 함께 이들이 전횡을 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마이경제 뉴스팀/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임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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