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점은 우리가 보름달이 아니라 초승달이라는 점이다. 초승달을 보름달로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열정이다. 우리 기업문화는 한마디로 ‘와이 낫(Why not"’이다. 한국 금융계를 선도하고 아시아에서 위상을 높여가려면 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고 뼈아픈 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만 한다. 항상 도전하는 임직원, 그러한 임직원들의 기를 살려줄 수 있는 기업문화, 그것이 '와이 낫’의 의미다.”(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농부의 아들로 자수성가한 박현주 회장에게는 ‘샐러리맨 신화’ ‘개척자’ ‘혁신가’ 등의 수식어가 따른다. 이에 비해 대기업 오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업을 승계한 김남구 회장은 '책 읽는 CEO' '전략가' '안정적 리더십' 같은 정적인 이미지가 앞선다.
김 회장이 가업을 승계해 내실을 바탕으로 차분히 회사를 키워온 스타일이라면, 박 회장은 맨몸으로 창업해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것을 가장 먼저 해내는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남다른 혜안으로 성공을 일궈왔다는 공통점도 보인다.

◆'공부하는 CEO' 김남구, 거듭된 실패에도 꺾이지 않는 집요함으로 은행업까지 진출
국내 증권업계의 1인자로 우뚝선 김남구 회장은 잘 알려진 학구파다. 한 달에 10여 권의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에 열심이고, 세계 석학들의 강연을 직접 찾아다니며 배움을 쉬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부친인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독서교육'에서 시작된다.
동원산업에서 원양어업을 하던 김 명예회장은 바다에 1년 이상 장기간 나갔다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출항하기 전 첫째 아들인 김 회장에게 '독후감' 미션을 줬다고 한다. 김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작성해 아버지 책상에 올려두어야만 했다.
어릴 적부터 독서교육으로 지식을 얻은 김 회장은 회사 수장에 오르고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거두지 않았다. 바쁜 일정에도 지난 2013년부터 2년 간 중국 칭화대 경영학 과정을 듣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중국 베이징을 오가는 열정을 보인 것은 대표적이다.
그의 학구열에서 비롯된 독서경영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한국투자금융그룹 계열사 임원들은 한 달에 1권 이상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는 전통이 남아있다.
독서에서 비롯된 그의 학구적 성향은 경영에는 치밀한 전략가의 면모로 발휘되고 있다.
동원증권 수장에 오른 직후인 2005년에 단행된 한국투자신탁증권 인수전이 그 대표적 사례다.
당시 동원증권 경영진에서 예상한 매각가는 4000억 원대였지만 김 회장은 한국투자신탁증권의 미래와 성장가치를 보고 최종 매수가로 5412억 원을 적어 내도록 했다. 당시 경쟁자였던 미국 칼라일도 시장의 예상가격을 훌쩍 뛰어 넘은 5400억 원을 제시했지만, 김 회장의 치밀한 전략에 밀려 불과 12억 원 차이로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김 회장은 “한국투자금융지주 차원에서 자금을 동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다만 기회비용을 한국투자증권에 줬을 경우와 다른 계열사에 줬을 경우를 비교해보고 있다”고 과감한 배팅의 배경을 설명했다.
김남구 회장의 또 다른 특징은 차분하지만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집요함이다.
김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 중에 하나는 '와이 낫(Why Not)'이 있다. 무엇이든 하면 되지, 왜 안 되느냐는 도전정신을 잘 보여주는 구절인데,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계기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 재학시절이었던 1986년 알래스카 명태잡이 원양어선을 타던 시절로 돌아간다.
김 회장은 서울대생을 대상으로 한 채용설명회에서 스스로 학창시절 한량이었다고 하면서 "졸업을 앞둔 시기에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원양어선을 탔다. 그곳에서 하루 18시간씩, 6시간만 자고 꼬박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던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장남이었던 그가 당시 세계 3위의 원양어업 회사였던 동원산업 대신 국내 증권업계에서도 중형사에 불과했던 동원증권을 선택한 것도 그 때 얻은 도전정신의 결과로 풀이된다. 실제 김 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원산업은 이미 정상에 올라 있었지만 증권은 그렇지 않았고, 그런 입지가 오히려 성장할 수 있느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고 밝혔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도전정신은 그의 주요 경영활동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 회장은 한국투자신탁증권(現 한국투자증권) 인수전과 같은 M&A 성공사례가 있지만 서울은행, 대우증권, 현대증권 인수전 등 실패 사례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김 회장은 지난 2002년 서울은행 인수전에 참여했지만 인수협상자로 선정되지 못했고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대우증권 인수전에는 라이벌 미래에셋그룹에 밀려 고배를 마신다. 뒤이어 열린 현대증권 인수전도 KB금융지주에 밀리며 자존심을 상하게 된다.
하지만 2연속 패배가 확정된 어느 날 김 회장은 현대증권 인수전에 참여한 주요 임원들에게 채찍 대신 "괜히 기죽지 말라"고 격려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한국금융지주는 2017년 카카오뱅크 설립에 뛰어 들어 58%의 지분을 투자하며 은행업 진출을 이뤄내는데 이 역시 숱한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결과다. 2002년 서울은행 인수전에 뛰어들었지만, 하나은행에 패배했고, 조흥은행과 하나은행 인수에 관심을 보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당시 "인터넷은행 카카오뱅크 역시 앞모양은 달라도 뒷모양은 은행이다. 대출심사도 해야 하고 자산운용도 한다. 마케팅 방식은 달라도 은행은 같은 거니까 우리도 배워보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는 말로 은행업에 대한 꺾이지 않는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박현주, '펀드신화'부터 글로벌시장 개척까지 선구자적 혜안 빛나
박현주 회장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최초'라는 수식어다.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출시(1998년), 국내 최초 해외운용법인 설립(2003년), 국내 최초 해외법인 운용펀드 출시(2005년), 국내 최초 중국 본토 부동산 투자(2006년)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박 회장이 미래에셋을 창업한 지 1년이 갓 지난 1998년 12월에 처음으로 선보인 상품이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다. 뮤추얼펀드는 당시 선진국 시장에선 보편화된 투자상품이었지만 당시 IMF 금융위기 직후로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주식 대신 원금보장이 되는 예금상품에 주로 투자하던 시기였다.
무명의 신생 회사가 내놓은 낯선 상품에 대한 시장의 전망은 극히 비관적이었다. 당시 미래에셋이 신문에 광고를 내려고 했지만 큰 광고회사들이 거절해서 할 수 없이 직접 광고를 만들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박 회장은 본인이 직접 상품설명회를 직접 뛰어다니며 투자자들을 설득한 결과 '박현주 1호'는 판매 3시간 만에 500억 원 어치가 모두 조기완판되는 신화를 썼다. 박현주 1호 펀드는 출시 7개월 만에 수익률 100%를 달성하며 국내 자본시장에 충격을 준다.
2002년 40대 나이에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AMP 과정를 마친 박 회장은 그 이듬해 국내 자산운용사 중 처음으로 해외 진출을 선언하고 홍콩에 해외 현지 법인을 설립한다. 주변에서 해외진출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했지만, 박 회장은 2005년 국내 첫 해외법인 운용 펀드인 ‘아시아퍼시픽스타펀드’를 출시해 한 달 만에 2000억 원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박현주 회장이 '최초' 타이틀을 거듭 써내려 간 것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 때문이다. 박 회장은 틈이 날 때마다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서운 것은 두려워하는 것, 포기하는 것이다. 갈증과 도전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을 선물했다. 현재를 보는 눈과, 통찰력을 가지고 미래를 보는 눈이다. 미래를 향한 투자와 혁신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좋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미래에셋의 혁신은 처음엔 낯설었고, 다음엔 인정받고, 결국 상식이 됐다. 시작은 불가능한 상상이었지만 나중은 사회가 인정하는 현실이 되었다."
도전에는 당연히 위기와 실패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당장 1997년에 창업을 하자마자 국가부도 위기였던 IMF사태를 맞았지만, 박현주 펀드로 대박을 내며 성공 신화를 썼다. 인도에 진출한 다음해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글로벌 투자사들이 대거 인도에서 빠져 나가는 상황에서도 박 회장은 인도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뚝심을 발휘해 현지는 현지에서 9위의 자산운용사로 성장하는 결실을 거뒀다.
2007년에는 '인사이트 펀드'를 줄시해 한 달 만에 4조 원을 모았으나 이듬해 글로벌 증시 폭락으로 손실율이 무려 60%에 달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박현주 회장이 직접 나서서 수익률 회복을 약속했고 2014년에 겨우 원금을 회복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미래에셋은 이 때의 실패를 거울 삼아 중국에 몰려 있던 투자 라인업을 홍콩, 일본 등으로 확장하면서 여러 국가에서 상품 순위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성공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차이나전기차SOLACTIVE'가 9월 29일 기준 순자산 1조8755억 원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위도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차이나휴머노이드로봇'으로 2345억 원이다.
홍콩 시장에 투자하는 ETF 중에서도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차이나항셍테크'가 순자산 1조1599억 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인 삼성자산운용의 KODEX 차이나항셍테크(순자산 1826억 원)와 상당한 규모 차이를 보인다. 일본과 인도시장에 투자하는 ETF 역시 모두 미래에셋자산운용 상품이 순자산 1위를 달리고 있다.
박현주 회장은 지난 2018년 미래에셋증권 회장직을 내려놓고 미래에셋증권의 해외 컨트롤타워인 미래에셋홍콩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국내 사업은 최현만 당시 부회장을 비롯한 전문경영인에게 맡긴채 박 회장 본인은 해외시장에 총대를 멘 것이다. 2년 전 박 회장은 미래에셋대우 회장 취임 당시 약속한 "국내 경영은 전문가 시대를 열어가겠다"면서 "계열사 부회장 및 대표이사가 책임경영을 하고 본인은 글로벌 비즈니스 확장에 주력하겠다"는 말을 지킨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선구자적 혜안을 인정 받아 박 회장은 지난해 7월 국제경영학회(AIB)에서 아시아 금융인 중 최초로 '올해의 국제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했다.
박 회장은 수상소감을 통해 "모험적 창업자들이 이끄는 글로벌 사업을 바라보며 '왜 금융은 안 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며 "그동안 전략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면 과감한 투자 결정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 신입사원 면접 챙기는 김남구, 적군도 데려다 쓰는 박현주...인재 등용에는 한 마음
박현주 회장과 김남구 회장은 '용인술의 귀재'이기도 하다.
우선 김 회장은 '신뢰'를 기반한 용인술로 정평이 나있다. 한 번 믿는 인재는 끝까지 믿고 간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이 믿고 맡긴 최고경영자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부여한다.
대표적으로 핵심 계열사인 한국투자증권은 2005년 출범 이후 20년 간 바뀐 최고경영자(CEO)가 3명에 불과할 정도다. 지난 2007년부터 2018년까지 12년 간 한국투자증권 CEO를 지낸 유상호 부회장의 재임 기록은 현재까지도 증권사 최장수 CEO 기록으로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한국투자증권 대표직에서 물러난 유상호·정일문 부회장은 증권 대표이사 퇴임 이후에도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김 회장 곁에서 조력자로 함께하고 있다. 한 번 신뢰하면 끝까지 함께 한다는 김 회장의 용인술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의 섬세하면서 치밀한 용인술은 말단 신입사원 채용 시에도 발휘된다. 대표적으로 한국투자증권은 신입사원 채용시 최종 면접에 그룹 오너인 김 회장이 직접 나선다.
김 회장은 연간 500여 명 정도를 직접 면접을 볼 뿐만 아니라 지난 2003년부터 23년 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학교 캠퍼스 채용설명회에 연사로 직접 참여할 정도로 인재 경영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채용설명회는 주주총회와 더불어 김 회장이 빼놓지 않고 참석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다.
한국투자증권은 '공채' 문화가 사라진 증권업계에서 매년 100여 명 이상의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문화도 이어가며 신입 채용에도 진심이다.
김 회장은 지난달 23일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채용설명회에서 자신이 직접 채용설명회에 참석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우리는 돈이 있어 이제 더 우수한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그래서 제가 여기 서 있고, 저희 회사에 와주십사 여러분들께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우수한 인재 영입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열정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 회장이 인재 양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다보니 스스로도 한투의 채용 과정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그가 한 사내행사에서 "여기 낙하산은 나 뿐"이라며 "여러분들은 내가 직접 보고 뽑은 사람들이니 자부심을 품어도 된다"고 언급할 정도다.
김 회장이 원하는 인재상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열정을 가지고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파트너를 찾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우리는 앞으로 함께 할 동반자를 뽑고 싶다. 금융을 통해 세상을 더 풍요롭게 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 우리의 동반자 상이다."
“도전과 열정이 필요한 곳이다. 안정적 직장을 원한다면 공무원을 준비하라. 신입사원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할 파트너를 찾고 있다.”
김 회장은 학생들 앞에 나설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박현주 회장 역시 탁월한 용인술을 가지고 있다. 뛰어난 인재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미래에셋으로 데려와야한다는 철칙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오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 창업 시작 과정부터 동업자와의 철저한 협업으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당시 동원증권 동료였던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박현주 사단'으로 불리는 수 십여명의 측근과 함께였다.

그는 자신과 전문경영인의 철저한 분업을 강조한 지도자다. 박 회장이 전체 사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린다면 비즈니스 모델을 비롯해 실천에 옮기는 것은 전문경영인의 몫이다. 박 회장은 창업 초기를 제외하고는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맡은 적이 없다. 자신은 그룹 오너로서 큰 의사결정과 해외사업만 전담하고 주요 계열사는 '내치'는 전문경영인이 책임지는 경영구도를 수 십년 째 이어가고 있다.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최현만 전 미래에셋증권 회장은 2015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 회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주식, 채권, 부동산, 빌딩 등 그간 미래에셋이 투자한 해외자산을 박 회장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서 "그는 몸으로 실천하는 분이며 파괴적 혁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이다.
박 회장은 회사에 필요하다면 라이벌 회사 인재도 서슴없이 영입하는 강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2019년 초 실적이 부진하던 트레이딩 부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국투자증권 김성락 부사장과 김연추 투자공학부 팀장을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두 사람은 한국투자증권 내에서도 연봉 1위와 2위를 기록한 증권업계의 스타였다.
영입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을 영입한 첫 해 미래에셋증권의 트레이딩부문 순영업수익은 전년 동기 대비 3배 이상 급증한 5786억 원으로 4477억 원에 머문 한국투자증권을 1000억 원 이상 격차로 완승하게 된다. 이후 현재까지 트레이딩 부문 실적은 미래에셋증권이 계속 앞서가고 있다.
인재영입에 대한 박 회장의 갈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지난 10일 열린 국민성장보고대회에서 "앞으로 경쟁자는 글로벌 창업자이며 이에 대비해 좋은 인재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지분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인재와 과감하게 지분을 나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박 회장은 인재 영입 뿐만 아니라 인재 양성에서도 일찌감치 눈을 뜬 지도자였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 창업 초기 시절이었던 1998년에 미래에셋희망재단을 설립했고 2년이 지난 2000년에는 사재 75억 원을 출연해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만든다. 당시 미래에셋증권은 신생 증권사에 불과했지만 박 회장은 회사 설립 초기부터 인재양성에 과감한 투자를 집행하는 강단을 보인다.
미래에셋희망재단은 국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학업과 자기개발을 위한 장학금 지원 사업을 중심으로,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은 해외교환 장학사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투트랙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박 회장은 미래에셋희망재단에게는 자신이 보유한 미래에셋컨설팅 지분 25%를 기부 약정하고 미래에셋박현주재단에는 지난 2010년부터 자신이 미래에셋 계열사로부터 받은 배당금 전액을 기부하는 등 진심을 다하고 있다.
박 회장은 평소에도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라며 "미래의 인재에게 투자하는 것이 미래에셋이 고객과 사회로부터 얻은 것을 환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한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이철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