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기업의 AI 활용이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이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AI 활용으로 인한 편리함 뒤에 교묘한 알고리즘으로 소비자를 조정하고 피해를 양산하는 일도 현실이 되고 있다.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은 2026년 창간 20주년을 맞아 AI가 몰고올 소비자 생태계 변화와 혼란을 진단하는 연중 기획 시리즈를 진행한다. [편집자 주]
기업들이 차별화된 인공지능(AI) 기술을 탑재하고 있다며 AI를 제품 마케팅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단순 자동화 기술이나 센서 탑재, 기존 알고리즘을 포장한 것에 그치는 경우도 빈번해 소비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 시정조치가 있었지만 전자상거래시장에서는 여전히 AI 워싱 현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기존에 이미 적용돼 있던 음성 인식 기술을 AI로 포장하거나 제3자의 검증이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AI 기술이 제품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됐는지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AI 워싱 행위는 실제보다 제품의 성능을 과장해 소비자의 합리적 구매 선택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AI 기능의 실효성을 검증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이게 왜 AI 가전이야?...단순 기능에 그치고 구체적 설명도 없어
온라인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 상세 페이지를 살펴보면 ‘AI 워싱’이 적지 않다.
쿠팡에서 7만7500원에 판매되고 있는 '듀플렉스 AI 음성인식 서큘레이터'는 제품 상세 페이지를 통해 '스마트 음성 제어' 기능이 탑재돼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음성을 통해 ▲선풍기 작동/중지 ▲풍속 1~8단 설정 ▲디스플레이 점등/소등 등의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옥션에서 7만2780원에 판매되고 있는 '한경희 AI 음성인식 8단풍속 스탠드 좌식겸용 리모컨 선풍기 서큘레이터'도 마찬가지다. "선풍기 켜줘", "좌우회전 꺼줘" 등 정해진 명령어를 말하면 작동한다.
이들 제품에 적용된 기능은 단순 음성인식 수준이지만 제품명과 판매 페이지 전면에 버젓이 AI를 강조하고 있다.
단순 음성인식 기능은 미리 정해진 명령어와 패턴을 인식해 특정 단어가 감지되면 그에 대응하는 기능을 실행하고 학습 기능은 없다. 예를 들어 "전원 켜"라고 말하면 전원이 켜지고 정해진 표현이 아니면 인식이 실패되는 구조다.
반면 'AI 음성인식'은 음성 데이터를 학습하는 것은 물론 문맥 이해 기능을 갖췄다. 예를 들어 "오늘 좀 덥지?"라고 말하면 에어컨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방식이다.
AI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제품에 적용됐는지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설명 없이 제품명에 버젓이 AI를 붙이는 경우도 많다.

쿠팡에서 5만6400원에 판매 되는 한일산업의 '이한일 휴로스틱 인체감지 침대용 AI 카본 온열 전기매트'는 상세 페이지에 "인체의 진동을 감지해 사람이 없으면 자동으로 전원을 꺼주고 움직임이 다시 감지되면 자동으로 켜주는 스마트한 매트"라며 홍보하고 있다.
AI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됐는지 의문 부호가 붙는다. 인체의 '진동'을 감지해 전원을 자동으로 제어하는 기능 역시 고도화된 학습 기반 인공지능이라기보다는 단순 움직임 감지 센서를 활용한 자동 온·오프 기능으로 볼 수 있다.

쿠팡에서 2만8800원에 판매되는 '크리썸 AI 스마트 케어 칫솔 살균기'는 상세 페이지에 “'PIR AI 센서'를 적용해 사용자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고 안내한다.
PIR은 적외선으로 사람을 감지하는 기술로 제품에 어떤 AI 기능이 어떻게 적용됐는지 소비자로선 알 길이 없다.
AI 기능 적용 관련한 제3자 검증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앞서 사례로 언급한 제품들 역시 AI 관련 인증 마크나 설명이 없다.
옥션에서 13만1720원에 판매되는 '26년형 클래파 400W 강력 AI기능 BLDC 진공 무선청소기'는 AI 기능을 통해 바닥에 있는 먼지들을 감지하고 흡입력을 조정할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AI 기술이 제3자 검증을 받았다는 설명은 없다.
AI 인증마크는 대표적으로 한국표준협회(KSA)의 ‘AI+ 인증’이 있다. 해당 인증을 받기 위해선 ISO 42001 국제표준과 AI 산업 추가 요구사항을 기반으로 AI 제품의 품질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경영체계를 갖춰야 한다. 또 국제표준을 기반으로 품질특성 및 사용자 관점의 인공지능 기능 시험도 거쳐야 한다.
다만 AI+ 인증은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닌 민간 인증 제도로, AI 기능이 탑재된 제품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해당 인증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AI 기능을 전면에 내세워 마케팅을 진행하는 제품일수록 외부 검증을 통해 소비자 신뢰를 제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주요 가전업체들은 AI 기능에 대한 소비자들의 오인을 방지하기 위해 마케팅 문구로 사용 시 사전에 다양한 측면에서 살피고 있다.
현업 부서와 법무, 홍보 부서 등이 AI 기술에 대한 표현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제품에 AI 문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삼성전자의 '비스포크 AI 콤보' 세탁기는 "옷감 종류 분석은 AI 맞춤 코스(세탁모드)에서 최대 3kg의 세탁물 내에서 동작한다", "세탁물의 오염도 감지는 AI 맞춤 코스(세탁모드)에서 최대 9kg의 세탁물 내에서 동작한다"며 AI 기능 적용 범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LG전자의 'LG 디오스 AI 오브제컬렉션 냉장고'는 AI 기술이 사용자의 냉장고 사용 패턴을 학습해 2시간 전 미리 최적의 냉기를 공급하는 등의 딥러닝 기반 방식임을 적시하고 있다.
특히 가전 업계에서 AI 워싱 현상이 빈발하고 있는 것은 기술 정의의 모호성과 제품 차별화 경쟁이 맞물려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업계 관계자는 "AI에 대한 명확한 기술·법적 기준이 없는 가운데 가전 시장에서 제품 차별화와 프리미엄 이미지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겹치면서 AI 용어가 마케팅적으로 확대 사용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AI 기능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면 기술에 대한 소비자 신뢰가 저하될 우려가 있어 특히 가전제품에 대해 AI 기준이 투명하게 세워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AI의 범위가 매우 넓어 알고리즘이 일부 적용된 경우에도 AI로 홍보하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며 “AI가 워낙 트렌드다 보니 무분별하게 제품 키워드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장보은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공지능, 로봇, 블록체인 등 기술의 발전으로 소비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AI 워싱 등 새로운 형태의 소비자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며 “투명성과 소비자 보호를 위한 거버넌스 구축 등 실질적인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 공정위 시정조치에도 AI 워싱 의심 사례 수두룩...“AI 기능 실효성 검증 기준 필요해”
공정위는 지난해 11월 7일 한국소비자원과 국내 전자상거래 업체에서 판매되는 가전·전자 제품을 모니터링한 결과 AI 워싱 의심 사례 20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공정위가 밝힌 주요 사례로는 ▲세탁물이 3㎏ 이하일 때만 작동하는 'AI 세탁 모드' ▲특정 조건에서만 구동되는 'AI 공기청정' ▲내부 온도에 맞춰 자동 조절하는 'AI 냉장고' 등이 있었다.
이름만 보면 AI 기술이 적용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동화 수준이거나 제한적으로 기능한다.
당시 시정 조치를 받은 업체들은 'AI 기능 에어쿨러 냉풍기'라는 표현을 '자동온도조절 에어쿨러 냉풍기'로 바꾸거나 제습기의 습도 센서 기반 자동 습도 조절 기능을 '인공지능 기능'으로 표현한 것을 삭제했지만, 여전히 AI 워싱 현상은 여전한 모습이다.
AI 워싱 문제 제기는 해외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영국의 앱 개발 스타트업 빌더 AI는 자동으로 앱을 만들어 준다는 AI 매니저 '나타샤'를 내세웠는데 실제로는 인도인 개발자 700여 명이 현지에서 수작업으로 코딩하고 결과물을 고객에게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6년부터 8년 동안 AI를 가장한 채 운영했다.
아마존의 무인 매장 아마존고의 ‘저스트 워크 아웃’ 역시 2016년 세상에 없던 매장을 공개했으나 2022년 기준 처리한 결제 품목 1000건 중 700건은 인간 검토자의 손을 따로 거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코카콜라는 지난 2023년 신제품 'Y3000'을 AI와 공동 개발한 음료라고 홍보했는데, AI가 개발 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 AI 워싱 논란을 일으켰다.
공정위는 소비자 피해를 예방하고 사업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올해 중 인공지능 관련 부당한 표시·광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예정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소비자원과 협업을 통해 주요 제품 분야별로 AI 워싱 행위에 대한 모니터링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소비자원 측은 "AI 기본사회 실현을 위한 관련 부처의 제도 정비에 활용될 수 있도록 인공지능 및 관련 신산업 분야에 대한 소비자 정책 연구·조사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소비자들은 AI 기능이 탑재됐다는 홍보에 기존 제품과 차별화된 새로운 기능을 기대하게 된다”며 “실제 성능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소비자를 기만하거나 현혹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국 차원에서도 AI 기능의 실효성을 검증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감시 활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정은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