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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 단거리 육상에서 페이스메이커가 하는 일
 박혜진
 2026-09-22  |    조회: 76

단거리 종목에서 페이스메이커(pacemaker)는 결승선까지 함께 달리는 동반자가 아니라, 정해진 구간까지 정해진 속도를 만들어 주고 빠지는 역할을 맡는다. 전문가가 먼저 확인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끌어 놓은 구간의 랩 타임이 선수의 기존 기록보다 얼마나 앞서 있는가, 둘째는 그가 빠져나간 뒤 선수가 자기 리듬으로 그 속도를 유지하는가입니다. 이 둘이 어긋나면 좋은 구간 기록이 전체 기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첫 구간을 지나치게 빠르게 끌어 준 상황이라면, 선수는 산소 부채를 안고 후반 구간에 들어가면서 보폭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반대로 너무 느리게 끌면 기록 단축의 여지 자체가 사라집니다. 결국 페이스메이커의 값은 '얼마나 빨리 달렸는가'가 아니라 '선수가 혼자 달릴 수 있는 속도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만들어 줬는가'로 매겨집니다. 대회별 운영 방식과 기록 인정 기준은 WMM 메이저대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이 장면을 보는 사람은 순서를 정해 두고 보는 편이 낫습니다. 먼저 출발 직후 첫 곡선 구간에서 페이스메이커가 선수의 어느 위치에 서는지를 봅니다. 앞에 서면 바람을 막아 주는 효과가 생기고, 옆에 나란히 서면 속도 감각을 맞춰 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다음으로 그가 빠져나가는 지점을 확인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용어가 '랩 타임(lap time)'과 '페이스 배분(pace distribution)'입니다. 랩 타임은 한 바퀴 또는 정해진 구간을 도는 데 걸린 시간이고, 페이스 배분은 전체 구간에 힘을 어떻게 나눠 쓰는지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200미터 트랙이라면 곡선과 직선의 비중이 반복되므로, 같은 랩 타임이라도 어느 지점에서 그 시간이 나왔는지에 따라 부담이 달라집니다.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보면 단순히 앞서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기록 설계를 대신 수행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경기 일정과 운영 방식은 스포랭크 경기 일정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대개 결승선 부근의 접전만 기억합니다. 반면 오래 본 사람은 페이스메이커가 빠져나가는 순간의 선수 자세를 봅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하면, 기록이 만들어지는 지점이 결승선이 아니라 교대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수가 페이스메이커가 사라진 직후 상체가 살짝 일어서고 보폭이 흐트러지는 장면을 보였다면, 그건 체력이 바닥난 신호가 아니라 속도 감각을 넘겨받는 데 실패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숙련된 관찰자는 이때 팔 흔들기의 진폭과 착지 지점이 안정되는지를 함께 봅니다. 이 두 가지가 곧 돌아오면 배분이 살아 있는 것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앞 구간에서 이미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같은 장면을 두고도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에 따라 읽히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작동 원리는 단순합니다. 페이스메이커는 선수가 스스로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구간을 만들어, 판단에 쓰일 에너지를 아껴 줍니다. 효과가 나는 조건은 그가 선수의 리듬과 어긋나지 않는 속도를 유지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선수가 평소 후반에 강한 유형이라면, 앞 구간을 조금 억제해 주는 페이스메이커가 맞습니다. 상대의 대응책은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교대 지점을 앞당겨 페이스메이커의 영향권에서 일찍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붙어서 속도만 받아먹는 것입니다. 앞당겨 벗어나면 자기 판단 부담을 일찍 떠안는 대가를 치르고, 끝까지 붙으면 상대의 속도 설계에 자신의 기록을 맡기는 대가를 치릅니다. 어느 쪽이든 공짜는 없습니다.

 

페이스메이커는 기록을 대신 만들어 주는 장치가 아니라, 선수가 자기 힘을 어디에 쓸지 정해 주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그가 빠져나간 뒤의 몇 걸음이 그날 기록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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