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간의 퇴직연금 과열경쟁을 두고 수익성 악화와 건전성 부실로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련없음.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임민희 기자]수조원의 황금시장으로 급부상한 퇴직연금을 유치하기 위해 금융권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금상품 금리가 치솟고 있다. 은행과 보험의 경우 시중금리보다 높은 6.0~6.5%를, 증권사의 경우 7~8%대의 고금리 상품을 내놓고 있다.
가입자의 입장에서는 이자를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으니 좋은 소식인지 모르겠지만, 금융사들은 제살깎아 먹느라 피멍이 들 지경이다.
과도한 유치경쟁이 실적 악화로 이어져, 수익 보장은커녕 서비스 저하와 금융사 부실로 이어질 경우 소비자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또 퇴직연금에 과다한 금리를 보장하느라 다른 상품에 가입한 소비자들에게 손해가 전가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금융권 퇴직연금에 사활, 과당경쟁 변질
금융사에 가입한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2월말 현재 15조원을 돌파했고 올해 말 폐지되는 퇴직보험과 퇴직신탁을 퇴직연금으로 전환하거나 중간 정산할 경우 연말에는 3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은행, 보험, 증권사 등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퇴직연금 황금기를 맞아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과도한 수익률을 보장하거나 수수료를 대폭 인하하는 등 공격적인 영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부터 신설 기업들은 퇴직연금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고 기존 기업들도 법인세 감면 등 세제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올해 말까지 퇴직연금 전환이 불가피하다. 이에 따라 명예퇴직이나 사업자 전환을 앞둔 한국은행과 한국수력원자력, 포스코, 한국전력 등 대기업과 공기업을 잡기 위한 금융권의 사활을 건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말 5992명이 명예퇴직한 KT의 경우 금융사들이 명예퇴직자들의 개인퇴직계좌(IRA)를 유치하기 위해 증권사를 중심으로 8%대의 고금리 경쟁을 벌였다. 미래에셋증권은 최대 8.3%의 금리를, 현대증권은 연8% 이상 금리를 보장하는 파생연계증권(DLS)을 특판 판매했다. 한국투자증권도 연7.5% 금리로 주가연계증권(ELS)을 발행했고 하나대투증권이 연8%, 삼성증권과 동양종합금융증권이 연 7.5%의 고금리를 제시한 바 있다.
한국은행의 경우 지난 12일 공지한 사업자리스트에 따르면 20여개 사업자가 제시한 금리는 시장실세금리보다 연 1.5~2.0% 높았다. 은행과 보험의 경우 연6.0~6.5%, 증권사의 경우 연 6.8~7.2%가량의 원리금보장상품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말 현재 예금은행의 총 수신금리는 연 3.20%, 시장형 금융상품 금리는 연 4.49%(잔액기준)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최근 시장금리 인하를 반영해 은행들이 예금금리를 줄줄이 인하하고 있는 상황에서 6% 이상의 고금리 연금 상품은 지나치다는 시각이다.
그럼에도 퇴직연금 규모가 4000억원 규모의 한국수력원자력과 1조원에 육박하는 한국전력과 포스코는 물론 아직 퇴직연금을 도입하지 않은 대형 대기업에 대한 유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가입자는 당장 좋을지 몰라도 금융사는 피멍들어
보통 공기업의 경우 은행, 보험 등 금융업권 별로 복수가 아닌 1개의 사업자를 선정하고 있지만 금융사들은 역마진 우려에도 사업자 선정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고금리 경쟁에 이은 수수료 인하와 꺽기 행위 같은 편법을 사용하고 있다.
삼성생명의 경우 최근 적립액의 1%였던 수수료를 0.2% 인하하기도 했다. 대형증권사들은 원금보장형 주가연계증권(ELS) 등을 통한 원금보장이라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고 있다. 은행들도 고금리 경쟁에 동참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대출을 미끼로 퇴직연금 가입을 강요, 권유하는 ‘꺾기영업’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금융권의 퇴직연금 과열경쟁을 두고 자칫 수익성 악화와 금융회사의 건전성 부실로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금융사들도 과당경쟁에 따른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업계 간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삼성생명 측은 "퇴직연금 유치를 위해 금융권에서 고금리 등의 제살깎아먹기식 경쟁이 나타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금융당국의 제재 등 적절한 조치가 필요함을 지적했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 계열사 간 몰아주기 의혹에 대해서는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면서 기존 퇴직금을 넘겨 받은 것일 뿐 몰아주기는 아니다"고 일축했다.
국민은행 퇴직연금사업팀 관계자도 "퇴직연금은 은행, 보험, 증권 등 영역에 관계없이 53개 사업자가 자율 금리를 통해 유치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도 "모 증권사에서 퇴직연금관련 고금리 상품을 출시하자 다른 증권사들도 따라 내놓으면서 경쟁이 붙었고 미래에셋도 일부 그런 상품을 내놓은 게 된 것"이라며 "증권사뿐만 아니라 은행, 보험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금리 안정화, 근퇴법 시행 등 제도적 장치 시급
퇴직연금 사업자간 과당경쟁을 막고 제도적 활성화를 위해서는 금융당국의 엄격한 감독과 제제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금감원 보험계리연금실 연금팀 황성관 팀장은 "퇴직연금 적립금은 올해 2월말 현재 15조원이고 연말에 30조원이 전망되는 큰 규모의 시장으로 사업자 유치과정에서 과열양상을 보인 것은 사실"이라며 "고금리나 수수료 인하 자체는 불법이 아니지만 이로 인해 금융회사의 건전성과 사후관리 등이 부실해질 수 있기 때문에 금리 안정화 노력은 물론 불법행위에 대한 실사와 상시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퇴직연금의 활성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근퇴법) 전부개정법률안이 조속히 시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근퇴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근로자가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을 혼합해 설정할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넓히고 퇴직금 중간정산 지급요건 강화, 복수사업자 허용, 신규사업장 1년 안에 도입 등이다. 근퇴법 개정안은 2008년 11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에 발의됐지만 비정규직법 등 쟁점법안에 밀려 1년 4개월째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노동부 임금복지과 이준호 사무관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전세계적으로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3층 노후소득보장제도를 활용하고 있는데 근퇴법은 퇴직연금을 발전시키는 법안"이라며 "퇴직연금제도의 발전과 지속적인 확산을 위해서라도 근퇴법 통과는 시급하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