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이청준 씨의 소설 '축제'는 죽음의 축제성을 예술미학으로 복원시켰다. 1996년엔 동명의 영화로도 선보여 심금을 울렸다. 전통 장례의식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로 어머니와 죽음을 밑바닥에서 다시 들여다보게 한 작품이다.
이씨는 1994년에 모친을 잃었다. 그는 이듬해 가을 영화촬영장에서 노모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의 제목이 '축제'인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치매로 주위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던 노인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호상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고, 노인을 돌본 주변인들의 정성을 기린다는 뜻도 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죽음이 또다른 시작을 상징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삶과 죽음은 상호 분리된 게 아니라 연결돼 있으며 따라서 그 축제성은 생사를 초월해 살아 있다는 거다.
주인공 이준섭은 작가 자신임을 금방 알 수 있다. 3인칭 시점을 사용했지만 삶의 흔적과 내적 죄책감 등이 작가의 그것을 연상시킬 만큼 빼닮았다. '이준섭'은 곧 '이청준'이며 소설은 바로 그의 삶인 것이다.
유년 시절에 준섭은 고향을 등지고 광주로 유학을 떠나면서 홀로 남겨진 어머니에게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런 다짐은 현실과 맞부딪히면서 점차 퇴색하고 결국 불효자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는 임종 순간에 '비녀'를 달라고 한다. 시집올 때 가져왔던 낭잣비녀다. 시집살이하면서 비녀를 빼앗겼고, 이는 잃어버린 삶과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 삶과 자존심을 죽음이라는 최후 고비에서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준섭이 아들로서 갖는 죄책감은 장례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복질녀가 "할머니도 팔아묵고 집안식구들도 팔아묵고…'라고 쏘아붙이며 응어리로 마음속 깊이 남아 있던 그의 죄책감을 건드려 끄집어낸 것이다.
죽음이 축제인 것은 이런 묵은 감정을 씻어내주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3일장을 치르는 동안 내내 불거졌던 갈등은 가족들이 원망을 하나하나 벗어내고 화해함으로써 해소의 길로 접어든다. 가족사진촬영 장면이 이를 잘 상징해준다.
작품에서 준섭은 어머니를 여읜 심정을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께서는 평생 동안 우리를 씻기고 입히고 돌봐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할머니께서 떠나가시려는 지금 단 한 번 씻겨 드리고 있는 중이다. 평생 입은 은혜를 오늘 마지막에 단 한 번 갚아드리는 기회인 셈이다."
슬픔만으로 가득할 것 같은 초상집 분위기는 결국 흥건한 잔치마당으로 승화한다. 전통의 장례가 항용 그러지 않았던가. 시끌벅적하고 분주한 가운데 신명과 흥취로 난장이 돼곤 했다. 산자와 산자, 산자와 죽은자가 다시 만나 용서하고 화해하는 자리다. 역설 같지만, 울고 웃는 장례마당은 곧 삶과 죽음이 왁자하게 어우러지는 놀이판이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이번엔 그 자신이 질펀한 축제판을 벌여주고 천국으로 떠났다. 2일 오후,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의 고향마을에서 거행된 노제는 유유히 흘러가는 삶과 죽음의 행로와 순환을 다시한번 깨닫게 해줘 우리를 숙연케 한다. 그렇다고 보면 우리는 모두 떠나는 자가 마련해주는 축제판에서 흠씬 놀다가 훗날엔 자신이 그 주인공이 돼 남은 이들에게 축제판을 한바탕 열어주고 떠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비탄과 오열에만 젖어들 수 없는 것은 죽음과 삶이 결국은 하나이며 어떤 생명도 그저 변화할 뿐 없어지지 않는다는 진리 덕분이라고 하겠다. 이씨의 말처럼 죽음은 또다른 시작이며, 삶이 영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질펀한 축제는 오늘도 계속되는 것 아닌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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