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올해 경제 성장률이 4.5% 이하에 머물 것이라고 8일 밝힌 것은 충격적이다.
평소 신중한 이 총재의 입에서 이같은 발언이 나왔다는 것은 경제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최근 올해 6% 달성이 어렵다고 밝혔지만 적어도 5%대의 성장은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기대를 국민들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총재의 비관적 경제 전망을 감안하면 이미 이같은 희망은 물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과 유가 급등, 곡물가격 폭등 등에서 비롯된 미국발 경기 한파의 영향으로 한국경제의 하강신호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원화값 추락은 물가 불안을 가중하고 있다.
고물가와 고유가 상황에서 성장률까지 낮아지면서 한국경제가 스태크플레이션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에 따라 추경편성을 통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이 다시 설득력을 얻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한은 4.5% 이하 전망..'비관적'
이 총재는 이날 금통위가 끝난뒤 기자회견에서 "올해 경제성장률이 당초 한은이 전망한 4.7%보다 낮은 4.5% 이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전망은 국내 어느 기관보다 낮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5.0%로 유지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보다 높은 5.1%다. 금융연구원은 4.8%, 삼성경제연구소는 4.7%, LG경제연구원은 4.6%로 대체로 한은의 전망치보다 높다. 한국경제연구원은 4.5%로 한은과 같았다.
해외 기관들의 전망은 편차가 심하다. IMF는 한국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4.2%로 낮췄다. 해외투자은행들 가운데 BNP파리바는 5.0%, 골드먼 삭스는 4.8%, JP모건은 4.6%, 리먼 브라더스는 4.3%, 모건 스탠리는 4.9% 등을 예상했다.
도이치방크와 씨티은행은 각각 3.9%로 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지만 전체 투자은행 평균은 4.6%로 한은에 비해 높은 편이다.
◇ 스태그플레이션 늪 속으로
한은이 한국경제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은 각종 경제상황과 관련 지표들이 적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유가는 7일 배럴당 123.8달러까지 치솟는 등 매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8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23.5원 폭등해 2년5개월 만에 최고치인 1천49원을 기록했다.
높은 국제유가에 환율의 상승이 결합하면서 국내물가는 더욱 불안해질 전망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에 비해 4.1%나 급등했다. 소비자물가가 4%를 기록한 것은 2004년 8월(4.8%) 이후 3년8개월만에 처음이다.
물가가 불안한 상황에서 성장률 둔화는 뚜렷해졌다. 지난 1.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기대비 0.7%로 2004년 3.4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1.4분기부터 경기가 하강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됐다.
또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3월 산업활동동향에서 선행지수 전년동월비가 4개월째 하락세를 지속했다. 동행지수 순환변동치 역시 2개월 연속 내려갔다. 아울러 생산자제품의 출하보다 재고가 빠르게 늘면서 3월 제조업 재고.출하비율(재고율)은 100.1%로 경기 하강국면을 나타냈다.
◇ 추경편성 힘 실리나
경기상황이 나빠질수록 경기부양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그동안 작년도 세계잉여금 가운데 4조9천억원을 올해 예산으로 편성해 경기의 빠른 하강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감세와 규제완화를 통해 경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국가재정법)을 고쳐야 하는 추경편성은 당 이미지에 타격을 주기 때문에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장은 이런 입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흔들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경기의 하강세가 더욱 뚜렷해지면 대책을 내놓으라는 여론의 수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국회의 속성상 6월에 추경논의를 시작하면 실제로는 4.4분기에 이르러야 집행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렇게 되면 경기하강을 막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않아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정부는 아직도 추경편성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다. 새 국회 개원후에 추경편성 논의가 재개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아울러 주무부처와 이해관계자 등에 의해 추진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각종 규제완화 방안, 여론의 분위기를 살펴야 하는 감세정책 등의 추진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 "경기하강 빨라..부양은 신중해야"
전문가들은 한은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4.5% 이하로 제시한 것은 경기 둔화가 당초 예상에 비해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임경묵 한구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올해 1.4분기 성장률이 5.7%인데, 한은 예상대로 올해 전체적으로 4.5% 이하가 되려면 4.4분기에 3%대로 떨어져야 한다"면서 "한은이 당초 예상보다 경기 둔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규복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작년 4.4분기 이후로 경기가 둔화되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각 기관들이 연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성장률 전망치를 계속 내리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경기가 둔화된다고 해서 당장의 성장 목표에 치우쳐 경기 부양에 나서는 데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 연구위원은 "경기가 상승한다고 과열은 아니며, 하락한다고 반드시 부양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고 지적하고 "올해 하반기 성장률이 4%대 초반으로 떨어지더라도 내년 상반기에 반등할 수 있다면 부양책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내년에도 경기가 계속 나빠질 것으로 전망한다면 정책당국 입장에서 어느 정도 부양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 연구위원은 "세계경제가 작년보다 안 좋아졌고, 유가가 오르고 있기 때문에 원유생산국을 제외하면 성장률이 올라갈 수 없다는 상황을 정부가 인식하고 이를 감내할 준비가 돼야 한다"면서 "올해만 경제운용을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년 이후를 고려한다면 단기적인 대응책보다는 성장잠재력 확충 등 구조적인 이슈에 좀 더 신경써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