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솥 뚜껑 플라스틱만 교체하는데 수리비 15만 원? = 전남 고흥에 사는 김 모(남) 씨는 쿠쿠전자 압력솥의 부품을 구매하려다 수리가 원칙이라는 안내를 듣고 황당해했다. 김 씨는 밥솥 뚜껑 닫히는 부분의 플라스틱이 손상돼 닫히지 않아 서비스 센터를 방문했다가 15만 원에 달하는 수리비에 부품 구매를 문의했다. 그러나 쿠쿠 서비스 센터에서는 부품을 판매하지 않으니 수리를 의뢰해야만 한다고 했다는 주장이다. 김 씨는 "플라스틱 부품 값이 얼마인지 모르나 부품을 떼어내는 데 20분이 안 걸리는데 15만 원 수리비는 너무 과도하다"라며 "부품을 따로 판매해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 드럼세탁기 배수 펌프만 교체할 수 있는데 무조건 출장수리 불러야? = 부산 해운대구에 거주 중인 김 모(남) 씨는 지난해 LG전자 드럼세탁기를 사용하던 중 배수 펌프가 고장났다. 김 씨는 부품만 교체하려 했으나 수리해야한다는 답을 들었다. 출장 수리를 신청하면 출장비 2만5000원과 공임비, 부품비까지 10만 원이 넘는 금액이 나와 부담이 크다는 것이 김 씨의 입장이다. 그는 직접 배수 펌프를 분해한 사진을 보여줬지만 서비스 센터는 출장 수리만 가능하다고 반복 안내했다. 김 씨는 "부품을 다른 데서 구할 수 없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지출을 해야 하는 것"이라며 "출장 수리를 하더라도 부품은 판매해야 서비스 아닌가"라고 난감해 했다.
# 인터넷에서 2~3만 원에 판매하는 부품, 자가수리 안돼 수리비 12만 원 = 경기 안성에 거주 중인 김 모(남) 씨는 지난해 사용 중이던 오텍캐리어 제습기의 고장 수리비를 아끼고자 부품 구매를 문의했다가 수리만 가능하다는 안내에 황당해했다. 김 씨는 제습기의 습기 측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습기 센서만 교체하면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회사에 문의했는데 출장비와 공임비, 센서 포함 12만 원의 수리비가 예상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센서만 구입해 자가 수리를 진행하려 했지만 따로 팔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 김 씨의 주장이다. 현재 아마존 등 유통 플랫폼에서는 센서 부품을 2~3만 원대에 판매하고 있다. 김 씨는 "부품을 사면 누구나 손쉽게 교체할 수 있는 상황을 말도 안 되는 수리비로 무조건 방문 출장만 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라며 "출장비에 공임비까지 수리비를 내느니 버리고 말겠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수리하는 '자가 수리권'을 놓고 제조사와 소비자 간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단순 부품 교체 수준의 경정비 조차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소비자들의 주장이다. 안전 문제로 출장 수리가 필요하다는 제조사와 충돌을 빚고 있다.
자가 수리권 보장 내용을 담은 법안을 두고 국회에서 논의가 수 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진전은 없는 상황이다. 자가 수리권을 적극 보장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 사례를 감안하면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 삼성전자 제외하면 자가수리 허용 제품 찾기 힘들어
전자·가전업체를 기준으로 국내에서 자가 수리 서비스를 허용하는 제조사는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3년 5월 국내에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 포진한 서비스 센터로 대면 수리가 용이한 탓에 실효성에 의문 부호가 붙기도 했지만 대상 제품을 꾸준히 늘려 호평 받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다양한 제품군에서 자가 수리 부품을 판매 중이다. 국내에서 전개하는 자가 수리 제품은 갤럭시 S21·S22·S23·S24·S25 시리즈를 비롯해 갤럭시 Z 플립5·폴드5·플립6·폴드6·플립7·폴드7 등 스마트폰과 태블릿 갤럭시 탭, 노트북 갤럭시 북 프로, TV 등이다. 세탁기, 건조기, 청소기, 모니터는 간단히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을 제공하고 있다.

반면 LG전자는 국내에서 소모품 판매만 진행하고 있다. 청소기 A9과 A9S, 세탁기 미니 워시의 먼지통 뚜껑과 문짝 등이다. 공기청정기는 필터와 바닥 무빙휠을 판매하고 있다.
생활가전 전문 제조사로 범위를 넓히면 자가 수리 영역은 더욱 좁아진다. 코웨이, 쿠첸, 쿠쿠전자, 위닉스, 오텍캐리어 등 주방·생활 가전 업체들은 자가 수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제조사들은 수리의 어려움과 함께 고장 우려, 안전사고 발생 위험 등을 이유로 든다. 소형 전자제품이 아닌 이상 제품을 분해해 부품을 교체하고 재결합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쿠쿠전자 관계자는 "가전제품 특성상 제품별 구조와 안전 요소가 상이해 임의 수리 시 오작동이나 안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전문 서비스 기사를 통한 점검 및 A/S 이용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LG전자 관계자는 "소모품을 제외한 제품 동작에 영향을 주는 주요 부품과 전문 기술이 있어야 수리 가능한 기능성 부품 등은 판매하지 않고 있다"며 "고객이 직접 수리 시 제품 고장으로 이어질 수 있고 전기 제품이라 고객 안전사고를 고려한 조치"라고 밝혔다.
오텍캐리어 관계자도 "에어컨은 다른 가전제품 대비 높은 전기 사용량과 냉매 등이 있어 전문가의 수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코웨이 관계자는 "별도의 수리 키트를 제공하지는 않는다"며 "다만 필터나 세척 스틱·키트 등 서비스 키트는 제공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 미국·EU는 2021년부터 자가수리 확대, 대통령 공약 포함됐지만 진전 없어
자가수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국내와 달리 미국과 EU 등은 지난 2021년부터 소비자 권리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환경연구원(KEI)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은 지난 2024년 '제품의 수리를 촉진하기 위한 공통 규칙 지침’과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를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을 연이어 채택해 정책 기반을 강화했다.
미국에서는 소비자 보호, 폐기물 재활용 운동을 전개하는 비영리 단체 PIRG(Public Interest Research Group)가 현지 자가 수리권 강화에 일조하고 있다. PIRG는 ▲수리 예비 부품을 소비자나 독립 수리점에 판매할 것 ▲제조사가 매뉴얼이나 수리 정보를 제공할 것 ▲수리에 필요한 도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PIRG는 실제 미국 여러 주에서 관련 법안의 통과를 이끌었다. 메사추세츠에서는 차량 소유주가 직접 제조사 공식 센터나 공인 정비소와 동일한 수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이끌었다. 뉴욕에서는 전자제품 수리권의 최초 제정을 도출했다. 이 밖에 뉴욕, 콜로라도, 미네소타,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지에서도 수리권 법안을 잇달아 통과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인도는 정부 차원에서 수리권 확대에 나서고 있다. 인도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법제화한 최초 국가이기도 하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지난 2024년 인도 정부는 소비자부(MCA) 산하에 Right to Repair India 포털을 설립해 제품의 수리와 재사용을 촉진하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제조사를 나열해 링크 형식으로 수리와 접근법을 안내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연결돼 있다.
호주는 제한된 범위지만 비교적 속도감 있게 수리권을 확대하고 있는 국가로 꼽힌다. 자동차와 농기계 등이 주를 이룬다. 농업 선진국인 만큼 농기계 분야에서 활발하다. 디어 앤 컴퍼니(존디어)가 소비자에게 농기계 자가 수리 도구 일부를 공개하고 소비자 독립 수리 지원을 확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2021년 강은미 당시 정의당 의원은 관련 법안인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을 21대 국회에서 발의했다. 당시 미국과 EU에서 잇달아 관련 법을 시행하면서 국내 역시 법적 기반을 만들어 자가 수리를 확대하자는 취지였다.
이듬해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공약의 일환으로 자가 수리권 확대를 내걸었다. 제조사의 수리용 부품 보유 기간을 확대하고 소비자에게 수리 매뉴얼을 보급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강 전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과 통합되면서 지난 2024년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권고적 성격에 그쳐 실효성은 여전히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제품 수명 연장을 위해 수리 용이성을 고려하고 수리에 필요한 부품 확보를 촉진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강제성이 없어 위반시 제조사가 제재를 받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소비자 주권 확보 차원에서 제조사의 자가 수리 서비스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명예교수는 “제조사는 소비자가 상품을 지속해서 유지보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의무”라며 “단순한 수리 같은 경우에는 부품 판매와 함께 수리 방법을 영상으로 제공하는 등의 노력으로 소비자 권리를 신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최창민 기자]
